찬양 :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찬송 322장)
말씀 : 이사야 1장 1~31
기독교와 타종교를 구별하는 데는 여러 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방향의 문제입니다. 타종교는 아래로부터 위로 즉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방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내려오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창세기가 처음 시작될 때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렇게 시작됩니다. 1장 1절의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셔서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또 인간이 죄 가운데 방황하자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습니다.
인간이 요구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세상을 창조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그 아들을 보내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세상을 창조해서 만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셨고, 교회를 세우신 것도, 그리고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 주 예수님이 오시는 그 시기도 하나님이 오직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끌고 가심을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선언케 하십니다.
1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이사야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4명의 왕이 다스리는 기간 내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왕들은 바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왕은 바뀌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2절과 3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역사를 끌고 가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고 계십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던 시절은 기원전 740년부터 기원전 681년까지 장장 60여 년 동안 예언자로 살았습니다. 그 시기는 외적으로 내적으로 상당한 위기와 어려움의 시간들있었습니다.
이사야는 남 유다의 예언자로 살았지만 당시 남 유다나 북 이스라엘은 모두 앗수르의 위협속에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큰 제국을 건설했고 앗수르의 그 다음 타깃은 이집트였습니다. 이집트를 짓밟고 넘어서기 위해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먼저 침략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사야는 남 유다에서 예언하면서 기원전 721년에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유일한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선언을 이사야가 합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진정한 주권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면 살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문제 뭐라구요?
소도 나귀도 자신을 길러 주고 먹이는 임자를 알 건만은 어떻게 너희는 너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창조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창조주 앞에 바로 서지 못하는가!
어떻게 너희는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살아가는가!
이렇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놀랍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11절 1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앗수르의 침략 위협 속에 이스라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가 앗수르의 침공이라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걱정은 짐승보다 못한 너희의 믿음이 걱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심 없이 진정성 없이 예배드리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당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없는 형식적인 예배가 이스라엘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도 이단이 문제다. 신천지가 문제다. 동성애가 문제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한국교회가 거룩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자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망한다면 그것은 신천지 같은 이단 때문도 아니고, 동성애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형식적인 예배, 마음 없는 신앙,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내용이 없어서 망할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우리가 어제까지 아가서를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원하는데 우리는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니 얼마나 하나님이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서로 변론하자! 변론하다 라는 말은 '야카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야카흐라는 단어는 '앞에 나서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 백성, 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발견하신 문제는 제물 뒤에 숨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많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드리면서 그 제사 뒤에 자신을 숨깁니다. 진정한 모습으로 서지 않습니다.
제물만 갖다가 던져주고 그리고 정해진 절기에 몸만 보여주고 정작 자신의 실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처방은 '야카흐!'
이제 숨지 말고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제물 뒤에 숨지 마라! 형식적인 예배 뒤에 너희 모습을 숨기지 말라! 이제는 너희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라!
예배드렸다고, 헌금했다고, 오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마치 자신이 경건하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외모를 보지 않고 마음을 보십니다.
하나님을 속이지 마십시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라는 말입니다. 나도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너희들 앞에 '야카흐' 하겠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너희를 대하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권위, 권세를 앞세우지 않고, 마음으로, 진심으로 너희를 만나겠다는 것입니다.
역사를 주관하는 주권자가 뭐 하러 우리에게 이토록 진심으로 대하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께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7절입니다.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구속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거듭해서 말씀하십니다.
반드시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의롭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정의가 없고 고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정의와 공의로 우리는 구원함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과 관계 맺는 삶이 정의이고 공의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바로 정의, 공의입니다.
결국 우리의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문제입니다.
형식적인 신앙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이 사회가 정의와 공의가 가득찬 사회가 될 것입니다.
야카흐! 거짓 신앙과 형식적인 예배 뒤에 숨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오십니다.
하나님의 구속과 위로를 덧입는 복된 하루가 될 줄 믿습니다.
기도
1) 시대가 흐르고, 수많은 권세자들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고, 또 사라져도 하나님이 영원한 주권자임을 고백하게 하소서.
2) 형식적인 예배로 우리 자신을 숨기지 말고, 늘 솔직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