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된 세상의 유일한 소망
(전도서 4장)
행동경제학 용어 가운데 ‘독재자 게임’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두 가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첫번째 실험에서 사람들을 갑과 을이라는 두 부류로 나누고 갑에게는 10만원씩 주고 을에게는 한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갑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을에게 나누어 줄 수도 있고 나누어 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느냐? 라는 물음에 60%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10만원 중에 2만원 정도 을에게 나누어 줬다고 합니다.
두번째 실험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갑에게 10만원을 주고 을에게는 만원을 줬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을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고 갑에게는 자신이 가진 것의 얼마를 을에게 줄 수 있고, 또 이번에는 을의 것을 마음대로 빼앗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을이 가진 1만원을 빼앗아 가졌다고 합니다.
이 실험은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그 권력을 ‘나 중심’으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전도서 기자는 본문 1~3절에서 이 세상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학대하는 자가 있고 학대 받는 자가 있으며, 학대자의 손에는 권력이 있고, 학대 받는 이에게는 위로자가 없다고 말하며, 사는 것 자체가 곤욕이고 고통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인간사에 ‘고통의 원인’을 생각해 보면 결국 사회적 구조 안에서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이 없는 자를 짓누름에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고통은 어디서 부터 오는가? 공부를 잘해야만 좋은 대학가고 성공 할 수 있다는 원리로 그들에게 목줄을 맨 권력자들로 부터 옵니다. 직장인들의 고통도 자신들의 생계를 붙들고 있는 갑들의 횡포로 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들이 더욱 고통 스러운 것은 이러한 을의 마음을 헤아려줄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전도자는 4~6절에서 이 모든 사회의 구조적 문제, 즉 갑과 을의 관계, 권력을 가지고 학대하는 자와 그 권력에 굴복하여 학대 받는 자가 생기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의 욕심과 욕망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4절에서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힘을 가진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5절). 그래서 6절에서 ‘두 손 가득히 바람을 잡는 것, 즉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욕심을 부리며 움켜쥐는 것보다 한 손으로 평온함을 쥐는게 더 낫다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인간사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욕망과 욕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여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가!
전도자는 7~12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가지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어떤 한 사람의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이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고 홀로 외로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많은 돈과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밤 낮 쉬지 않고 일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전도자는 이런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꺽고 사회의 불평등과 갑을관계등 지배계층의 학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사람의 중요성을 아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돈과 권력을 손에 넣고 나 중심으로 그 권력을 사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주변을 돌아보고 사람을 살리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다스리는 하나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공동체의 힘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난하여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 더 복된 삶이라고 잠언서 말씀에서도 여러번 보았지 않습니까?
처음에 도입예화로 언급했던 ‘독재자 게임’에서 만약에 실험했던 그 사람들이 서로가 잘 아는 공동체 였다면 게임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가 일면식도 없는 상태였고, 상대보다는 자기 자신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이어서 13~16절에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궁극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3절에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이 등장합니다. 학자들은 이 둘의 관계를 가지고 ‘요셉과 파라오’ ‘사무엘과 엘리’ ‘다윗과 사울’ 이런 성경인물들을 대입해서 설명하곤 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속 역사에 해박했던 솔로몬이 충분히 이를 염두하고 기록했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이들이 궁극적으로 예표하고 있는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권력 계층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로운 청년으로 자라났습니다. 16절에서 ‘그의 치리를 받는 모든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은 이 세상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할 본을 보이셨습니다. 가장 강하신 힘을 가진 존재가 가장 힘이 없는 모습으로 비참하게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학대 받는 자들, 아무도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없는 그들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이로 세워지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이 하루 아침에 갑을관계가 없어지고, 권력층과 지배계층이 사라지고, 평등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내가 속한 작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주님 안에서 진정한 은혜와 사랑을 나눌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질 것이고, 이미 인간의 사회구조적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함으로 저 천국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더욱 사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전도서 4장의 말씀을 통해서 이 세상의 구조적인 문제를 다시 한번 인식하고, 그리고 그 문제가 복음 안에서 해결 될 수 있음도 깨닫고,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지금도 고통 받는 삶을 살고 있는 수많은 자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해서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 복음이 희미해져 가는 이 시대에 여전히 복음만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답인줄 믿고 더욱 복음으로 무장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