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전도서 11:7-12:14
찬양: 내 진정 사모하는(마커스,유투브), 주님의 세계라(홍이삭)
전도자는 11장에에서 나이듦과 죽음을 이야기 합니다. 곧~ 올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 청년일 때에... 그 구원의 충만한 기쁨을 누려라!! 그럴 수 없을 때가 곧 온다.. 오늘 먹고 마시는 그 작은 일속에서 하나님을 보며, 그분께 감사를 드릴 때, 우리는 그 구원의 기쁨,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12장에 이르면 청년들을 향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12장 1절, 바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억하라. “창조주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은 우리가 창조주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그 진리는 우리로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 그 한계를 정해줍니다. 그 진리를 인정할 때 우리는 그 한계속에 우리의 자리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크엘룰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악은 우리 자신이 창조주라고 여기는 데서 유래한다” 그래서 죄를 이사야는 “반역”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있어야할 곳에 있지 않는 것!!
전도자는 11장에서 기쁨을 추구할 때, “근심(악)이 우리에게서 떠나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있지 않아야 할 그 자리, 하나님의 자리에 있을 때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근심 “염려”입니다. 이 염려는 탐욕, 즉 우상숭배의 죄와 함께 번성합니다.
왜 입니까? 내가 내 인생을 책임지는 하나님이기에, 내 상황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신념, 그것이 그로 그 죄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제프리마이어스는 말합니다. “염려는 사실 자신의 인생이 연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매한 자가 보이는 반응”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을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마6:27)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니깐 제발. 염려하지 말라. 니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염려해라. 니가 하나님이라면 염려해라. 그러나 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면, 너의 아버지가 창조주이시라면... 걱정마라! 너희에게 무엇이 필요한줄 하나님께서 더 잘아신다”
젊을 때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마치 자기의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그 하나님의 자리 서서, 그것이 죄요 반역이지요. 자신의 불확실한 인생속에서 어떻게든 그것을 통제해보려고, 염려와 걱정으로 사로잡혀 어떻게든 그것만 있으면 되겠다 하는 그것을 쥐어보려 하지만, 그것이 얻든 못 얻든 결론은 무엇입니까? 허무함...
그렇게 인생이 걱정과 염려속에 아둥바둥 살아가며, 이 순간에 주어지는 그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어떤 풍요함의 기쁨도 누리지 못한 채, 하나님의 성품, 그 선하심을 믿지 못하고 짜증과 불만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정말 절실한 마음으로 네가 아직 젊을 때, 나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놓쳐버렸다. 그러나 너에겐 아직 기회가 있지 않은가? 바로 지금 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타락은 모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없애버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창조주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3절부터의 장면은 “나이듦의 총체적인 적막감” 빛이 사라지고, 다 무너진 집... 전도자는 웅장했던 건물이 허물어져 폐허가 되는 모습으로 나이듦을 이야기 합니다. 이제 떨고 있는 집을 지키는 자는 한때 자신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부양할 수 있을 만큼 튼튼했던 자신의 손입니다. 이제 구부러진 강한자는 더 이상 자신의 무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다리입니다. 맷돌질하는 자는 치아이고, 창들로 내다보는 자는 눈이고, 길거리의 문은 귀인데... 결국 모든 것이 쇠약해져 버립니다.. 씹거나,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곧 삶의 끝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삶의 끝은 나이듦의 도움 없이도 올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날이 곧, 조만간 늦지 않게 올 것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우리의 손을 붙잡고, 부드럽게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그날이 오기 전,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너희 창조주를 기억하라! 우리가 그 창조주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이게 마지막 그의 결론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당신의 창조주를 기억할 수 있는가? 바로 “말씀”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이 이 말을 쓴 이유, 하나님의 말씀, 그것을 경외함으로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람의 본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씀안에 10절 아름다운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말들입니다. 말씀이 우리로 웃게 하고, 기쁘게 하며, 먹고 마시는 것의 기쁨을 우리로 깨닫게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11절 그 말씀이 우리에겐 채찍이 됩니다. 이 모든 말씀이 “한 목자”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주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지팡이가 됩니다. 그 지창이 끝에 못이 되어 우리로 찌릅니다. 우리가 짜증과 염려로, 시기심으로 헛된 것을 잡으며 살아가려고 할 때 그 못이 우리를 찌릅니다. “거기 아니야.. 이리로 오렴” “걱정하지마.. 내가 있자나..” “이제부터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거야. 그런데 걱정하지마.. 내 옆에 있으렴 네가 너무 힘들면 내가 안고 갈꺼고, 네가 길을 잃으면, 내가 반드시 널 찾을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나를 믿으렴”
이 말씀이 우리로 울게 합니다. 그리고 웃게 합니다. 우리로 헛된 삶을 기쁨으로 누리는 삶으로 살게 합니다. 마지막 이 전도자의 말로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14절. 그날이 다가온다. 전도자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여전히 흉내 내기, 꿈속에.. 현실을 회피하고 무시하는데 단련되었다. 그러나 죽음과 심판이 온다. 세상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려 하고 애써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 죽음을 똑바로 응시하고 서 있기 원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유한한 삶에 주신 선물과 같은 삶을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말이지요!
이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모든 날,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허락하여주셔서, 어떤 상황속에서도 그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고, 감사와 기쁨을 고백하고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며,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넘어, 우리에게 주신 유한한 삶속에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누리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