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을 보시면, 무리들이, 합법적인 사형권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갑니다. 첫째, 백성을 미혹한 죄. 둘째,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을 금지한 것. 셋째,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한 죄의 명목을 만들지요. 이에 3.4절. 빌라도가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즉, 자신의 왕 되심을 부정하질 않으십니다. 하지만, 빌라도가, 그 어떠한 죄도 발견할 수 없다 발언하자 무리들이 다시 강하게 5절. 반발하지요. 그런데 그 반발하는 말 중 “갈릴리에서부터”라는 말에 솔깃합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관할하는 지역이기에 그래요.
마침 헤롯이 7절. 예루살렘에 있겠다.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 만들기가 싫어 예수를 넘겨버립니다.
이에, 헤롯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지요. 그 이유는 8절. 이적 행하심을 기대해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셔요. 헤롯의 열심과는 달리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질 않으십니다.
10절. 유대인으로 보이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희롱하고 죽이기를 고소하니 11절 이에 헤롯도 거침없이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누가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덧붙여요. 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이와 동일한 말씀이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하여 예수를 거스려..
즉, 서로 원수라 하더라도, 절대 하나로 합해질 수 없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예수 죽이는 데에서만큼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가 되더라!에요.
예수님을 좋아하는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에 그래요. 즉, 저와 성도님이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넣어주신 사랑이 아니고서는 절대 불가합니다. 그래서 성도는요.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랑으로만 예수님을 사랑할 수 가 있습니다.
이것을 누가는, 살인자 바라바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삶으로 설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본문에는 소개되어 있질 않지만, 마태복음 동일 본문을 찾아보면, 명절 때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었어요. 먼저 바라바는 19절. 민란을 주도하고 살인한 자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무리들의 선택은 예수님이 아닌 살인자 바라바였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살인자 바라바는 예수님으로 다시 살게 된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누가는 본문을 읽는 독자인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바로 대속의 은혜, 즉, 너희들이 다시 살게 되는 이 구원은, 너희들의 자격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닌~~. 오직 대신 죽어주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일방적인 은혜라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은요.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방식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혜를 확인한다는 차원에 불과해요. 그래서, 굳이 오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강제로 지우게 한 사건이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는 결코 너희들의 자격과 의지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지워진다는 것을 누가는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 두 명의 의인 이야기로 누가복음 23장은 닫힙니다. 한 명은, 바랄 수 없는 중에 그 나라를 바란 행악자 였습니다. 같이 죽어가는 마당에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고 오직 42절. 그 나라의 임재만을 바랍니다.
또한 51절.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요셉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우리가 구한다 해서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넣어주셔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오직 43절. 주님의 권세에 달린 나라입니다.
이것을 재차 확인시키고자, 마지막 의인이신 예수님께서도 46절. 자신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겼다는 말씀입니다.
47절.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오늘 하루도, 살인자 바라바와 구레네 사람 시몬을 기억하여 그 대속의 십자가 은혜만을 찬양하시고, 두 명의 의인처럼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임재만을 사모하되 / 마지막 의인이신 예수님도 자신을 아버지께 맡겨드렸듯이, 오늘 우리의 삶과 생명과 구원까지도 모두 성부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복된 화요일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을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