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찬송가 455장)
말씀 : 누가복음 14장 1~35절
오늘 말씀은 크게 4가지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종병들린 자를 고치시는 장면, 상석이 아닌 말석에 앉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 큰잔치의 비유, 그리고 제자가되는 길이 어떠한 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사건의 배경을 보면 두가지로 나눌수 있습니다. 식사자리에 참석한 이들을 향한 가르침과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도로 오늘 말씀을 보시면 결국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참된 제자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이해하실때 가장 눈여겨 보아야 할 말씀이 33절에서 3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것은 이 말씀이 우리가 가진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소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소금의 본질은 짠 맛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금은 그 짠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가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제자가 가져야할 본질적인 모습은 나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유도 주앞에 다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주앞에 우리의 소유를 내려놓는다는 말은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의 진짜 뜻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는 자가 제자라는 말이고, 주님이 주신 그 모든 것을 선한 청지기가 되어 잘 사용하는 것이 제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본질이 나에게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짜 제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소위 나야말로 진짜 주님의 자녀요 제자라고 말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식사자리에서 만납니다. 지지난주 주일 설교에서 묵상했듯이 식사자리를 예배의 자리라고본다면 오늘 말씀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수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소위 진짜 주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떠합니까?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은 수종병들린 사람을 고쳐주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당시 율법학자들의 학풍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구덩이에 빠진 짐승은 구해낼수 있다는 규정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자기의 재산권에 해당하는 사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는 질문을 하시면서 우물에 빠진 소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그 죄를 도말해야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상실한 율법은 온전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의 본질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상황에서 짐승에게 배푸는 정은 죄가 안되는데 사람에게 베푸는 정은 죄가 되는 상황에 이르른 것입니다.
이어지는 자리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이렇게 이해가 됩니다. 당시 유대의 식사문화를 보면 중요한 손님을 위한 자리가 이미 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내가 그 중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나를 위해 드려지는 것이라 여긴다는 말입니다. 예, 실제적으로 예배를 통해 내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배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이 이상해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확실히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예배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며, 예배는 반드시 주님을 위해 드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창세기 12장 8절을 보시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합니다. 예배의 주인공이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배를 드림에 있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고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을 낮은 자리에 앉는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할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10절을 보시면 그때에야 영광이 있게된다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는 그제서야 높아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과 2절에서 우리가 예배할때 먼저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인 예배라고 말합니다. 이 영적인 예배를 드릴때 2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의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생각대로 가장 높은 곳에 먼저 앉으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습이 제자의 모습이겠습니까?
다음에 등장하는 큰잔치의 비유 역시 당시의 문화를 알아야만 합니다. 당대에 잔치는 잔치를 여는 사람이 사전에 날짜를 정하고 초청된 사람들에게 참석여부를 물은후에 그 수요에 맞추어서 진치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 나오는 밭을 산 사람, 소를 시험하러 가는 사람, 장가든 사람 등은 결국 잔치에 초대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종이 찾아갔다는 것은 분명 선약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밭을 사거나 소를 시험하거나 장가를 드는 것은 그 다음에 정해진 일입니다. 이 일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먼저 잔치를 베푼사람과 한 약속을 등한시하고 무시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입니다. 신학자들은 이 잔치를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먼저 구원의 잔치에 초대된 이들이 그 구원을 경멸히 여기고 그 구원을 나중으로 밀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 당시에 가장 하나님의 제자와 같았던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이런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본질을 완전히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본 바탕은 버리고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겉모습만 집처럼 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도를 말씀하시면서 소금의 짠 맛처럼 본질을 이야기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지난주 교육훈련 수료식이 있었죠, 성숙반을 진행하면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본질이 아닌 눈에 보이는 현상에만 집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열심인 모습은 있는데, 신앙생활의 맛은 누리지 못하고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성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열심인데 그 열심에 기쁨이나 행복이 없으니 자꾸만 신앙이 겉돌고 방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의 대부분이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었습니다. 마치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열심이 많은 바리새인과 같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최소한 저나 여러분의 지금은 오늘말씀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처럼 외적인 열심, 외적인 믿음은 대단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자는 열심만 있어야 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의 전부를 예수님께 드림으로 얻게되는 평강의 은혜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열심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 삶이 기쁨이요 행복으로 다가오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의 삶속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실때, 나의 신앙의 본질이 예수님에게서 시작하는지 아니면 바리새인과 같이 외식에서 시작하는지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시간 이후로는 짠맛을 가진 소금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세상에 반드시 필요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