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고통의 멍에 벗으려고(찬송가 272장)
말씀 : 사무엘상 28:1~25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말씀은 사울의 이야기 중에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인 엔돌의 신접한 여인의 이야기 입니다.
3절이 오늘 말씀의 배경으로 제시된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죽었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무엘은 25장 1절에서 이미 죽었음을 알려주었고, 그때에 사울이 우상숭배자들을 없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이 신접한자와 박수를 쫓아내었다는 말은 사울의 왕으로 오른 초기의 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기에 3절은 사울이 신접한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고, 그후에 사무엘도 죽었더라 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블레셋이 처들어 온 것입니다. 5절을 보시면 사울이 두려워했고 그의 마음이 크게 떨렸다고 말합니다. 이 말들은 지금 사울이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인해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왜 사울은 이와같은 완전한 낙망에 빠져버렸을까요? 함께 6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하나님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이 만나주시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영적인 어두움은 하나님의 부재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인생은 겉은 성공이고, 겉은 부유해보여도 좌절과 절망을 향해 달려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무서움입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이 우리의 인생에 미치는 실제적인 영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러한 부재와 단절이 주는 인생의 피폐함을 아시기에 예수님을 통하여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이런 오해는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지금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은 계속되는 사울의 완악함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그리고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에게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로 인해 다윗은 멀어졌고, 사무엘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미 주어졌던 수많은 기회들을 스스로 멀리했고, 그 결과로 지금 큰 낙망에 빠져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부재를 사울이 몰랐다면 우리는 오늘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이해할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사울은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말씀을 보면 이론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방법은 다 사용하였습니다.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시도도 해보았고, 우림으로도 시도해보았고, 선지자를 통해서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아! 그럼 진짜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안만나 주신거 아닌가요? 라고 여기실겁니다. 예 분명 제도적인 것은 다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그 문제가 바로 7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함께 7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왕에게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바로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주인이 아니라 부리는 종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사울이 바라는 하나님은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답으로서의 신일 뿐입니다.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강하게 할, 자신 밑에 있는 신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부릴 종으로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다윗의 이 고백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고 비교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51편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를 짓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지은 시입니다. 죄속에 있던 다윗, 그는 그안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 부재속에도 하나님을 만납니다. 무엇으로요? 하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연약하고 상한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드림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바라신 것이 바로 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상한마음을 가지고 가기보다, 그가 버렸던 과거의 죄를 찾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엔돌의 신접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이 신학적으로 아주 논란이 많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냥 일반적인 정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 아닙니다. 접신녀의 사술을 통해 그렇게 믿어버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접신녀를 통해 무언가를 간구하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에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것은 사울입니다. 최소한 사울은 이 환상을 실제 사무엘이라고 믿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접신녀의 입술에서 고백되는 내용을 무엇으로 받고 있었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겠지요. 그런 그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의 멸망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완전히 다른 답이었어요. 그래서 사울은 식음을 전폐합니다. 기력을 차리지 못할정도였어요. 그럼 이때 사울은 무엇을 해야 했겠습니까? 다윗을 예로 들면 하나님께 이 상한마음을 가지고 나아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알았기에 하나님께 메달려야 했습니다. 형식과 물질이 아니라, 그의 본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합니까? 접신녀와 신하들의 말을듣고 스스로 기력을 차리려 합니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는 그때에, 다시금 사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버려버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마지막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사울의 최후를 바로 다음 다음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살수 없는 미천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삼아주신것입니다. 미천한 존재에서 끝나는 것이 싫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부재처럼 여겨지는 일들은 실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진심을, 우리의 상한 그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주시는 강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혹시 이런 하나님의 부재를 만났다고 여기시는 분이 있다면, 그 상한 마음을, 그 아픈 모습을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평생을 이끄시는 하나님과 함께 싱가폴에서 승리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