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55편
찬양: 그때에 나는, 너 예수께 조용히 나와
시편 52편, 54편, 55편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주제가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토요일에 묵상한 본문가운데 다루었던 그 무거운 주제를 다시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 참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그러나 어쩌면 이 시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 어쩌면 성경이 우리에게 인생의 실체와,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서 참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52편은 에돔사람 도엑의 배신, 그는 이방인이었습니다. 54편은 십사람들의 배신, 그들은 같은 유다지파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러니 십 사람들의 배신은 도엑의 배신보다 더 큰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55편에 이르면, 13절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구” 이제는 같은 유다지파를 넘어 그의 친구요 가장 가까운 친구의 배신입니다. 누구인지는 단정할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의 배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상처를 그가 받았을 것은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믿고 의지하는 친구의 배신앞에 좌절하는 사람의 절망감을 여과없이 보여줍니다. 다윗이 바라는 것은 그 고통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인데, 그렇게 할수 없어서 그는 괴로워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무엇일까요?
먼저 1-8절은 배신의 쓰라린 현실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1-2절을 보면 그의 간구는 네가지 동사를 사용합니다. “귀를 기울이시고, 숨지 마소서, 내게 굽히사, 응답하소서..”
쓰라린 고통 가운데 있는 나의 기도에 모른척 하지 말아달라고 부를짖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의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괴로움…
우리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로 아픔과 고통속에서 빨리 툭툭 털고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적어도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말이지요. 그러나 신앙은 우리로 아픔을 느끼지 않게 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굳은 믿음을 가졌던 그였지만, 그 역시 아프고 쓰리고 힘들었습니다. 그런 그의 심정이 “근심, 편하지 못함, 탄식함”으로 나타납니다(2절). 무엇보다 “탄식한다”는 표현은 시끄럽고 난리가 난 상태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어디 안좋은 일 있어?”라고 물어보면 사실은 아니지만 “아니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마치 하나님앞에서도 우리는 “괜찮은 척”을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이기에..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 앞에 괜찮은 척 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의 기도는 괜찮지 않을때 드린 기도입니다.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드려진 기도가 아니라, 아프고 쓰라리고, 답답한 마음 그대로의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기도의 사람이지만, 여전히 이런 고난앞에서 그는 불안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4절에 가장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내 마음이 내속에서 심히 아파하여 사망의 위험이 내게 이르렀도다”(시55:4) 심히아프다는 것은 임신하는 여인의 최고조에 다다르는 고통, 몸은 뒤틀리게 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는 지금 엄살부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전쟁과 사울에게 쫓김의 시간을 통해 “죽음”이 주는 공포를 누구보다 잘알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지금 그 마음이 마치 죽음의 공포에 이른것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이 사람이었지만, 죽음의 공포속에 질식될것 같은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6-8절을 보십시요. 그는 차라리 날아가는 저 비둘기가 부럽습니다. 이 자리를 피할수만 있다면, 그는 “광야에 머무르리라”는 말처럼, 그의 아픔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마음은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850명의 거짓선지자들과 대결에서 승리하고는 이세벨이 그의 목숨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겁에 질려 광야로 숨었습니다.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의 패역함을 보고 차라리 그들이 없는 광야로 가고 싶다, 그곳에 머물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저 모든 사람이 다 두려워진 것입니다. 속임수와 거짓이 예루살렘 가득하고, 그곳은 자비와 정직, 즉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더이상 헤어날 수 없는 좌절과 절망, 그리고 우울함이 그를 가득 덮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16-21절.. 약간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16절..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사실 한국어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영어성경에는 그 원어를 살려서 번역한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게 머냐 바로 “but” 그러나 나는..
우리는 신앙인은 항상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신의 상황속에 아파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중요한 것은, 죽을것 같은 아픔과 고통이 다윗에게 있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를 그 자리에서 구원하여 내실 것을 알고 믿고 그분을 부르짖습니다. 그의 기도는 어떤기도였나요? 탄식하고 부르짖는 기도(17절)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탄식과 근심속에 드리는 부르짖음 조차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1-2절과는 다른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그가 그렇게 확신을 갖게 된 이유는 18절, 과거 그의 모든 전쟁속에서 그를 지켜주셨음을 그가 기억한 것입니다.그의 인생의 경험은 지금 다윗으로 하여금 “그러나 나는” 의 고백할 수 있게 한 것이지요.
그가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부르짖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을 향해서는 곧 심판이었습니다. 배신한 자들, 화목함을 깨뜨리고, 우유기름, 즉 버터처럼 그 말은 청산유수 같지말 그 말 속에는 화목을 깨뜨리려는 그 날카로운 칼이 숨어있는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그들을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 같은 처지와 같은 이들의 본이 되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22-23절은 그런 이들,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권면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언히 허락하시지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여 주꼐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배신과 같은 어려움을. 아픔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신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할 것입니다. 세상은 배신을 배신으로 갚으라 말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때에도 주님을 향해 부르짖을 것입니다.
기도를 할때 하나님은 우리의 짐을 대신 지어주시며, 우리를 아프게 한 자들로 하여금 신원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오늘도 주님께 부르짖으며 “나는 주님을 의지하리이다”라고 고백하며 오늘도 우리의 고통보다 크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 시감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1. 우리의 마음의 아픔을 주님께 정직하게 고백합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공감하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온전히 고백하며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2. 우리가 기도할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실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우리의 삶에 되게 하소서.
3. 여전히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아픔 가슴을 부여잡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여, 그들이 주를 향해 부를짖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그들로 하나님을 알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