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4편
찬양: 하나님이시여,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시편 44편은 분류상 애가입니다.특별히 이 시편은 개인적 차원의 애가가 아닌, 공동체차원의 슬픈 노래, 기도입니다.
1-8절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들에게 주신 승리를 회상하며 기쁨과 감사를 고백합니다.
9절.. “그러나 이제는” 전쟁에서 패하고 비참해진 상황, 기도해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상황속에 시편기자는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3절 이하에서는 그러한 절망속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더이상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렇나 절망과 비참함 속에서도 상황속에서도 여전히 그는 하나님께 기듣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이전에는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더이상 돌아보시지 않으시고, 기도에 응답하시지도 않으시며, 자신들의 비참한 패배를 그저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런 이해할 수없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어떻게 계속 기도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는가?
오늘 이 시편을 묵상하며 우리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시편기자가 마주하고 있었던 그러한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고통에 마주하고 있지만, 그럴지언정, 이 고통의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임을 우리가 기억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 어려운 시기에 무엇을 해야할까… 오늘 시편을 통해 말씀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우리가 함께 듣기를 원합니다.
먼저 1-8절을 먼저 보면,1-8절까지는 과거에 시인과 그의 나라에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절망가운데, 옛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자신의 경험이 아니라, 옛적 조상들, 아버지들로부터 들었던 영광스런 하나님의 승리의 이야기입니다.
애굽에 400년간 종살이로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가나안땅으로 들이시는 이야기.. 시편기자는 그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일은 주께서 주의 손으로 행하신 일이다!!” 자기 백성을 도우시고 승리케 하셨던 이유는 자신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 즉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그의 찬양은, 옛적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온 때에 하신 일로부터, 이제는 가까운 과거, 이 찬송을 부르는 시인이 경험한 일들로 나아갑니다. 4-6절은 그래서 주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바뀌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또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었음을 그는 고백합니다.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그는 “종일 자랑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동하여 매일 하나님만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 모두도 경험해본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든 하나님을 자랑하고 싶었던 그 은혜의 경험들 말입니다… 그 감격과 설렘과 감동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9절에 이르면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바뀌어집니다.
9절 “그러나 이제는”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더이상 하나님께서 그들의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종일 하나님을 자랑했던 그가, 그래서 이제는 10-15절, 능욕과 수치가 종일 그 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17-2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왜 이런 고난이 그들에게 주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런 고난을 초래할 만한일을 저지르지 않았다..” 마치 욥의 고백과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그의 고백 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어디서 본 이 말씀 같지 않나요? 사도바울이 로마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던 그 말씀입니다. 그는 로마서에서 이 시편 44편 22절을, 믿음을 지키며 고난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위해 씁니다. 왜 이 구절을 썼는가? 바울은 시편 44편에서 그들이 당했던 고난이, 그리고 그 초대교회 교인들이 마주했던 고난이 바로 “주를 위한 고난” 이었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이 말에는 소유에 개념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 구별된 자들, 주를 위하여 구별되어 성전의 양들이 제물로 바쳐진 것처럼.. 성도란, 바로 구별된 자,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구별된 자들입니다.
이유없이 계속되는 어려움과 고난속에서 있을때, 무엇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응답해주시지 않고,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는 것 같을때… 우리의 마음은 녹아져 내립니다. 과연 우리는 더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소망이 과연 소망이 있을까?…
시인은 이런 절망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합니까? 23-26절. 하나님이 더이상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 절망의 한복판 속에서도.. 그는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선택은 여전히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 절망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아무리 절망의 상황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가 기도해야함을, 기도할 수 있는 그 근거와, 여전히 기도속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요?
26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가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근거, 그 힘은, 바로 주의인자하심입니다.
인자하심, 이 히브리어 단어는 바로 우리가 잘 아는 그 단어이지요. 헤세드, 바로 언약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모든 절망의 순간에, 오늘날 특별히, 우리 공동체가 마주한 절망의 현실가운데, 언제쯤 헤어나올 수 있을까? 아니 헤어나올수는 있을까? 하는 여러움과 절망의 순간에 붙들 수 있는, 아니 여전히 붙들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합니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났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겐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생명보다 나은 그 헤세드,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에 근거하여 그는 기도를 포기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자기들의 도움이 되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 헤세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시편을 묵상하면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이 말을 썼을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매일 도살할 양처럼 여김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기억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절망 속에서도 말이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주를 위하여 도살 당할 양처럼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 언약에 신실하신 주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도살 당한 희생양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신실하신 헤세드의 사랑, 그 인자하심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향해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1. 기억하라! 가나안땅에서 베부르게 될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어버린 그 은혜, 우리로 다시한번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그 손길임을 다시한번 깨닫고, 기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2.오늘 우리가 절망과 같은 상황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그 헤세드의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주여, 오늘 우리가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이 세대속에서 소망을 외치는 자들, 그런 교회가 되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