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내 평생 소원 이것뿐 (450)
잠언 6장 "실제적인 교훈 - 게으름을 버리라"
여러분은 성도로 이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생각하는 것보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아낌없이 주어야 하고, 항상 베풀어야 하고, 참아야하고, 견뎌야합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큼 남을 사랑해야 하고 위로해야 하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도 항상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성경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에 아주 큰 함정이 있습니다. 무조건 착하게, 무조건 선하게, 무조건 사랑하며 사는 것이 결코 성경적인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지혜란 무조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4가지의 경고적인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일 처음의 경고는 보증에 대한 경고로 1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읽고 '결론적으로 보증은 비성경적이야'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지금도 한국교회에서 교회를 건축하면 성도들이 보증을 섭니다. 장로님과 중직자들이 믿음으로 보증을 섭니다. 그리고 그것은 믿음의 행동으로 여기지 비성경적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담보제도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된 관습입니다. 모세오경에서도 담보와 보증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즉 담보와 보증이 비성경적인 행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것을 아주 쉽게 생각하고, 성경에서 문제없다고 하니까 보증을 남발하는 행동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보증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과 26절에 보증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무슨 말입니까? 내 능력안에서의 도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없어도 될정도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에서 말하는 보증은 보증을 남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찮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았다고 보증을 섭니다. 2절에서 말하는 네입의 말이 구두로 한 보증을 말하는 것입니다. 보증 자체는 누군가에게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필요한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때문에 보증의 행동을 남발하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내가 해야할 기본적인 행동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보증의 올무에서 속히 떠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겸손히' 그리고 '간구한다'는 말의 원어 뜻은 힘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과 폭풍처럼 몰아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이 보증의 올무를 헤어나오기 위해 자신의 힘이 탈진할정도로 애를쓰며, 이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전의 게으르고 나태했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이해했습니다. 나의 삶의 자세를 바꾸어 보겠습니다" 라는 다짐이 아니라, 완전히 그리고 급격히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졸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와서 잠깐 눈꺼풀이 감기는 졸음에 빠져서도 안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행하는 이가 준비되어 있지 않고, 그에 대한 철저한 대비가 없다면 큰 해가 될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개미를 바라보며 진짜 지혜자의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개미의 행동을 바라보며 ‘준비’라는 개념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말하야 할것은 8절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마치 개미와 베짱이 동화처럼 해석하려 합니다. 여름에 잘 모았다가 추수때에 베불리 먹는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유대에서는 여름이 바로 추수철입니다. 또한 예비한다는 말은 단지 준비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잘 장만하고 질서정연하게 만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장은 모든 것을 완비해놓고 쉬라는 문장이 아니라 풍요로움속에서도 계속적인 준비와 대비가 필요함을 말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개미에게서 얻는 지혜란 꾸준한 삶입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젊을때 바짝 벌어서 노년에 편히 살자는 것이 아니라 젊을때건 노년의 때건 꾸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자의 삶이라는것입니다. 그리고 이 꾸준함이 결국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마음의 상태를 이겨낼 수 있다느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쉽고 편안한 삶을 위해 불량배의 삶을 살아가는 것, 남을 협박하고 무섭게 행동함으로 자기만 호의호식하는 삶, 그것이 결코 잘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는 삶임을 성경은 확신합니다. 이어서 16~19절의 말씀은 주님이 미워하시는 반사회적인 행동 일곱가지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이 모습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해하는 모든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자, 성경에서 말하는 부지런한 자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기만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꾸준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의 가르침을 보다 깊게 드러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니,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20~23)
주의 말씀을 꾸준히 계속적으로 묵상하며 살아가는 그 삶이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생명을 허락해준다는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길 바랍니다. 이 진리가 마음에 새겨져야 보다 더 세밀히 삶을 바라볼수 있고, 주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할때 말씀으로 방종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음녀의 길도 같은 모습입니다. 육체가 좋은 일입니다. 우리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행동입니다. 중독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우리를 죽이는 행동입니다. 32절의 말씀처럼 영혼이 망하는, 다시말해 다시 살아날 힘마져 빼앗기는 처절한 현실을 경험하게 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새벽에 이 말씀을 적용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점검해보기 바랍니다. 실제의 모습에 오늘 말씀이 말하는 잘못된 행동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지만 의미적으로는 상당히 많아보입니다. 우리의 즐거움만을 위해 주의 말씀을 곡해하거나 게을러서 미루어두거나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세상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모습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간 기도의 자리에서 이러한 우리의 모습이 있다면 주님께 내어놓고, 이시간 이후로 꾸준한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우리의 삶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습의 영적 게으름을 점검하게 하시고, 있다면 속히 벗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2. 지금에 삶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긴장속에서 꾸준한 성장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3. 이웃과 사회를 섬기는 일에 우리의 마음이 향하게 하옵소서(베다니봉사, PCC봉사, APEX봉사, 성요셉봉사의 자리에 함께 할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시간과 환경을 허락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