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 “아브라함의 믿음”
찬송가 :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유대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그의 믿음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왔는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이며, 왜 아브라함의 믿음이 오늘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 보면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가 그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겨주시기 때문임을 말합니다. 이어지는 3절에서 바울은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하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을 바라보매, 하나님을 붙잡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의롭게 여겨주신 것이라 말합니다.
유대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아브라함 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한낮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인간적으로 많이 누리고 많이 얻었다 할지라도 스스로가 가진 인간적인 한계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리고 아브라함을 믿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믿음, 신앙의 경륜 등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장 31절 말씀에서 또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믿음, 우리의 가족, 우리가 얻었다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라는 주어는 사라져야 할 것들이고, 오늘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 가운데 자랑되어져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진정한 믿음이며, 더불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오늘 우리의 믿음이 진짜 하나님께 있는지 아니면 스스로가 이루었다는 행위에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10절에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할례 때문에 온 것인지 할례를 받기 전에 온 것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할례를 받는 장면은 창세기 17장에 나옵니다. 17장 10절 말씀에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전에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15장 6절 말씀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창세기 15장의 믿음이 먼저고 17장의 할례로 대표되는 행위가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고 율법이 다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4장 13절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 아브라함을 통한 세상에 주어지는 축복의 약속은 할례 율법 때문이 아니라 오직 믿음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16절의 시작은 그러므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는 믿음의 자손들이라고 선언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어떤 눈에 보이는 결과를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 하나님을 기다리며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이어지는 19절 이하에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예로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된 과정이 나옵니다. 19절에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20절에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21절에 “약속을 확신하였고”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문구를 덧 붙였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믿음이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그려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6장에서 그는 아내 사래가 아닌 여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라는 인간적인 아들을 낳습니다. 사래를 통해 주어지는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지요. 창세기 17장에서는 다시 한 번 약속의 아들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에서 어떻게 99세 된 사래가 아들을 낳을 수 있겠냐며 비웃기도 했습니다(창17:17).
그렇다면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은 왜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연약한 믿음을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행동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있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보잘 것 없는 믿음을 크고 완벽하게 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어집니다. 24절 말씀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 소망이 있다는 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25절 마지막에 바울은 믿음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며 4장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의와 은혜는 그것을 완전하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죄인인 저와 여러분을 의롭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완전하시며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가정과 삶의 모든 영역을 덮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설 명절을 맞이한 오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는 하루가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한인교회연합 청소년 집회를 위해서
청년부 떡국 모임 및 다음세대를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