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425장)
예레미야 11장 “은밀히 떨어져 있는 예레미야”
예레미야 11장은 온통 언약과 그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관되게 내보이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그 목적은 바로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는 데까지입니다.
그러나 조건이 있지요. 오직 이 언약을 지킬 때에만 그 분의 소유가 되어 거룩한 성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 시작이 되는데, 20장부터 소제목들을 찾아보니 제단에 관한 법. 종에 관한 법. 폭행에 관한 법. 임자의 책임. 배상에 관한 법. 도덕에 관한 법. 공평에 관한 법. 안식년과 안식일에 관한 법. 절기에 관한 법. 명령과 약속 그리고 마침내 24장 시내 산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약을 세울 때 8절을 보니 “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마치 지금껏 열거한 수 많은 율법의 요구와 모든 명령에 대하여 모세가 피로 덮어버리는 장면 같습니다. 언약의 피가 모든 율법을 덮어버립니다. 아마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피에 대한 의미를 잘 알았을 겁니다. 피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죽은 자에서 산 자로 옮기어 주었습니다.
피뿌린 문설주와 문인방이 있는 그 집 안에 들어가 있는 이스라엘은 그 피로 말미암아 산 백성임을 알았습니다. 그 피를 바름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지요.
이처럼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겁니다. 비록 사망과 심판의 땅 애굽에 있기는 했지만, 그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며 보호를 받아 구원을 얻은 복된 백성이 된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도 그 피 아래서 애굽과 세상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들이요. 다시 그 새로운 피. 그 새언약 아래에서는 산 자들입니다.
따라서 진정 선택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은요. 오직 나를 위하여 피를 뿌리시어 죄를 사하시고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어 그 안으로 끌어당기신 예수의 공로만을 증거하고 찬양하는 자입니다. 그들은요. 오늘 예레미야 11장 18절의 예레미야처럼 내가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인생으로 살아가질 않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자신이 만들어가고 있질 않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거룩한 백성답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그리고 외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망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 타버린다. 이 백성은 70년 동안 바벨론에 가서 포로가 될 것이다. 대적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가라. 애굽 의지하지 마라. 그냥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망해야 산다.”
그러나 본문을 가만히 살펴보시면 20절.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통함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예레미야는 겉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은밀하게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매번 말할 때마다 입으로 표현한 그 말 속에 숨겨져 있는 그의 진심을 파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 직으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 고통 때문에 예레미야는 날마다 하나님께 탄원하였습니다. 앞으로 11장 이후에도 끊임없이 여호와 하나님을 불성실한 분으로, 거짓말쟁이로, 속이는 시냇물로 지칭하여 지독한 불평과 탄원을 함께 쏟아냅니다. 분명 예레미야는 2장 1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되는 고난에 의하여 여호와께서 자신을 속이는 시냇물처럼 느껴진다고까지 합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합니다.
예레미야게도 분명 내면 뿐만 아니라 삶으로 백성들과 타협하려는 내적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을까요? 예레미야도 예언직을 버리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예언 직무의 고통과 갈등으로 인해 그 예언직을 포기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의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이 실현됨을 보아야만 하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내적 고통과 갈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의 탄원에 21절로 23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응답을 하십니다. 한마디로 예레미야가 탄원을 늘어놓고, 이 불평에 대하여 여호와의 응답이 나오는 대화 형식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 번째 탄원인 17장에서부터는 예레미야의 탄원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응답하시질 않으십니다.
앞으로 저와 여러분은 계속하여 예레미야를 터진 토기처럼 만드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현실적으로는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알게 되지요.
이처럼 저와 여러분의 이 믿음의 길도 내가 가진 신앙이 옳다고 말하거나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싸울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내가 빚진 자처럼. 회개할 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이 마치 우리에게 빚진 자같이 우리 손에 죽으신 곳이 십자가임을 잊지 마시고 오늘 하루도 빚진 자처럼 한 걸음 내딛으시는 즐겁고 복된 화요일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25일에 있을 각 가정교회 별로 구디백 나눔과 방문을 통하여 성탄의 기쁜 소식이 전달되기를
2. 다음주부터 시작되는 특별새벽기도회 가운데 은혜로 온 성도들을 붙잡아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