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빈들에 마른 풀 같이 (183장)
"대속자" (욥기 19장)
본문에서의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난으로 인해 공동체 안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자신을 보고 탄식합니다. 하지만 대속자를 통해 자신의 순전함을 인정 받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2,3절을
보면 욥은 “너희가 내 마음을 번뇌케 하며 말로 꺾기를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라고 반문하면서 “너희가 열 번이나 나를 꾸짖고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라고 책망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분명 그를 위로하기 위해 달려 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악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처참한 욥의 모습을 보곤, 위로는 커녕 욥이 정말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구나 싶어 책망하고만 있습니다.
설령 그러하더라도 우선은 긍휼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욥의 상황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았고, 원인을 잘못 해석해서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본문은 그런 친구들과는 더 이상 변론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욥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스스로 그 원인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도록 돕는 일이 친구가 해야 할 부분 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합니다. 성도의 합당한 태도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는 죄를 용납하라는 말이 아니라 죄가 분명함에도 회개치 아니하는 사람에 대해선,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를 정죄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누가복음 6:37에 “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죽어 마땅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지연될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욥은 “내가 포학을 당한다고 부르짖으나 응답이 없고 간구할지라도
신원함이 없구나” 라고 애타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응답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도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습니다. 물론 죄가 있다면 가리워져 듣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정한 때에 응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107편9절에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욥은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때 그는 참 위로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바보고 구하고 있습니다. 욥이 사용하고 있는 ‘대속자’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엘’ 이라고 합니다. 고엘은
가족의 권리를 보존하는 상황에 개입하는 가장 가까운 친척, 구속자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은 점차 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고엘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잠23:11), 고난 받는 자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애3:58), 재앙과 구속으로부터 탈출시키시는 분(출6:6; 사43:1)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욥이 고엘을 원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무고한 죽음에 대해 보수할 자이기 때문에 욥기 전체는 고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이뤄진
계시에 따르면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과 다른 역할을 맡으신 예수그리스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에게 하나님은 확실한 대속자가 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우리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실 예수님이 계십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시길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삶이 힘겨워 낙심하고 절망하는 이들에게 위로부터 오는 위로가 넘쳐나게 하옵소서. 2. 비판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아닌,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품는 참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3. 오직 대속자이신 예수님을 붙들고, 주어진 삶을 힘 있게 살아내게 하옵소서 4. 복음축제를 통해서 영혼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