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변론하려는 욥
찬송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본문 욥기 13:1-28
가끔 우리는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 진것에 대해 참지 못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별히 평소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 강하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명예가 실추된 것을 참지 못하여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욥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명예가 더렵혀진 것에 대해 참지를 못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욥은 이전까지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드러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벌하셔야 하는 이유도 몰랐습니다(10:2). 그렇기에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명예회복을 받고 싶은 열망이 강열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욥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9:2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말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9:3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변론하다.’라는 것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법적 소송을 해서 승소와 패소를 가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욥이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서 다툼을 한다고 해도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명예회복을 받기 위해서 변론을 한다고 해도 패소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어떻게 고발을 한다고 해도 천 개의 질문으로 대응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연속으로 내 뱉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로 한 재판은 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욥은 명예회복을 위해 소송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욥이 13장에 와서 “하나님과 변론”하겠다고 합니다. 3절입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변론하다.’라는 것은 법률적인 용어입니다. 그러나 13:3에서 말하는 ‘변론’은 승소, 패소를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논하는 것입니다. 승패를 떠나 합의점을 찾는 것입니다. 불일치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욥은 하나님과 잘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의논을 통해 합의점을 찾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하나님을 고발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발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2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내가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고소의 내용을 말씀해 보시라고 하나님께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죄악이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자신이 죄를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증거를 가지고 오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하나님과 합의점을 찾는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명예를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희망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15절)을 하고 있으면서도 잃어버린 명예를 찾기위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믿는 믿음.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에게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욥에게 신앙은 그가 하나님을 믿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믿어주는 지에 대한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확인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되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명예는 참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 주의 제자로서의 명예는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하고 순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명예는 주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내가 덕을 쌓고, 내가 무엇을 했기 때문에 의로움과 명예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명예를 내세우고, 나의 의로움을 내세울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해주시고, 나를 사랑해 주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키셨기에 나에게 고귀하고 순결한 주의 제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명예가 되었고, 그것을 통해 의로움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이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의로움 또는 명예’라고 하는 함정에 빠져버릴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봉사를 하다보면 그것이 내 의가되고, 그것이 내 명예가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사역을 할 때, 새벽기도회를 많이 빠졌습니다. 물론 한국이라는 곳 자체가 밤 늦게까지 사역이 이뤄지다 보니까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앞뒤를 다 짜르고 결과만 말씀드리면 새벽기도회를 많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싱가포르에 와서는 새벽기도회에 빠진 적이 거의 없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생겨서 할 수 없이 빠진 것을 제외하고는 서킷 브레이커 전까지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처음에는 새로 부임을 했으니까 열심히 나왔습니다. 게다가 월요일에 새벽기도회가 없고, 새벽기도회 시간도 아침 6시이다 보니까 부담도 적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 참석하다 보니까 꾸준히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주님과 만나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는 기쁨이 아니라 ‘개근’이라는 것을 의로움처럼 여기고 있는 저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쯤에서 새벽기도회 한 번 빠져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해 보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봉사의 연수가 오래되고, 스스로 경건생활을 잘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찾아오는 ‘명예’, ‘의로움’이라는 함정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하루가 나의 신앙을 점검하는 귀한 한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지금 ‘명예’, ‘의로움’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나는 무엇을 위해 경건의 훈련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점검하셔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제자이자 자녀로 세워지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하나님 앞에서 내 신앙생활을 의로움이나 명예로 여기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려놓고 이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는 주의 자녀들을 돌보아 주시며, 앞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