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여러해 동안 주 떠나(찬송가 278장)
말씀 : 스가랴 1장
스가랴서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포로후기 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 묵상한 학개서 1장 1절에 따르면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동시대를 살면서 공통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독려하여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에스라서 1장을 보시면 바사왕 고레스 원년에 유다의 포로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조서가 내려집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예수아와 그 외의 다른 지도자들화 함께 약 5만명의 백성들과 노예들이 예루살렘과 우다성읍으로 귀환했습니다(스 2:64~67). 이들은 자기 고향에 정착하여 무엇보다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큰 소망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로 단을 만들었고 번제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스 3:1~7) 예루살렘에 온지 2년 2개월만에 여호와의 전이 건축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전의 기초가 놓아지는 것을 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기쁨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대적이 일어나 성전공사가 중지됩니다. 북쪽의 사마리아, 서쪽의 아스돗, 남쪽의 이두메 등 여러족속이 유다의 부흥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합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 성전재건은 중단됩니다.
성전의 재건이 중단된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꺽여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여기게 되면서 이스라엘의 신앙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소망이 사라지고 대적과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은 지쳐만 갔습니다.
바로 이러한때에 하나님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학개선지자와의 차이점은 스가랴 선지자가 영적갱신에 대해 더 실제적인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바라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수 있습니다. 3절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혼란을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포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땅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고 돌아온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이 말씀은 의구심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는 4절의 말씀을 첨언합니다.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 악한길 악한 행위를떠나서 돌아오라’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악한길 악한행위를 가진채로 하나님앞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던 모든 종교행위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몸이 돌아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로로 보내시기 전부터 계속 말씀하고 계신 본질적인 돌이킴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행위보다 먼저 이스라엘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스가랴 선지자는 16년간 중단된 성전건축을 다시금 독려하면서 먼저 이스라엘의 영적인 부흥, 본질의 회복, 성결한 삶을 실제적으로 제시해주고 있는데요, 그 상세한 모습이 이어지는 8개의 환상으로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스가랴에게 임한 8가지 환상은 하나님이 스가랴에게 하룻밤 동안 보여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사자의 해석이 곁들여 있습니다. 이상은 본 날은 성전재건을 시작한지 5개월째 되는 날이고 성전재건을 시작했던 백성들을 축복했던 9월 24일로부터 2개월 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이 환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전재건에 힘을 쏟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기뻐하심으로 주신 소망의 메시지로 바라봅니다.
7절에서 17절은 첫번째 환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 백성을 위해 “열심을” 내고 계시며, 그렇기 때문에 머지않은 시간에 그들과 그들의 성읍과 그들의 성전이 회복될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시면 천사들이 화석류나무사이에 선 여호와의 천사 즉 예수님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합니다. 다리오왕때는 바벨론 제국이 외적으로 평안과 안정을 누리던 때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정세를 보고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12절 말씀을 보면 천사들이 보고한 평안과 안정을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유다 성읍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고 계십니다. 지금 유다는 평안과 안정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이 중보로 위로의 말씀이 유다에 선포됩니다. 16절과 17절의 말씀인데요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먹줄이 쳐진다는 말은 측량하는 줄이 드리워졌다는 말로 예루살렘이 새롭게 지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심으로 풍부함이 넘쳐나고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임을 약속해주십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대적들의 핍박과 생활의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헌신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약속입니다. 지금을 이겨낼수 있는 산소망의 약속이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된 약속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네뿔과 네 대장장이 환상은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가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첫번째로 이방국가의 심판을 통해서 입니다. 4개의 뿔과 4명의 대장장이에 대한 환상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보여줍니다. 유다를 잔인하게 괴롭혔던 이방국가들을 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말하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뜨린 뿔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의미하며 숫자 4는 이 대적들로 인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것이 지금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긍휼과 위로로 대적을 향한 심판이 진행됩니다. 4명의 대장장이는 유다를 멸망시킨 4개의 뿔을 멸망시키기 위한 것으로 숫자 4는 다시한번 완전한 멸망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동시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삶만 생각해볼때 스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이때는 정말로 힘든 때였습니다. 아마 6.25전쟁이 끝난 50년대 중반에서 60년대 후반까지의 시대상을 생각해보시면 아마 딱 맞을 겁니다. 먹고사는것 조차 어려운 그때에 외부적인 힘듦은 더 많아지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 헤매던 때입니다. 그러한 삶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그땅에 온 원래 목적을 위해 달려나갑니다. 몸이 이스라엘에 온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의 목적임을 깨닫고 달려나갑니다. 그러할때에 오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이 아닌 앞으로 누릴 은혜와 소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은 아무런 변화가 없어보이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말씀이 스가랴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소망을 주고 힘을 주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중심이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섬김이 그들의 전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이 미래를 향한 소망의 말씀이 지금을 살아가는 그들에게도 은혜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 나아가는 그 걸음을 주님이 인정해주시고 있다는 것을 앞으로 누리고 경험할수 있다는 증표로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역시 같은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이 나에게 힘이되고 소망이되고 은혜가 되는 것은 지금 결과를 받았기때문이 아니라, 지금 나의 마음이 주님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향할때 우리의 중심이 주안에 있을때, 주님의 말씀은 은혜로, 능력으로 힘으로 소망으로 나에게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루. 이 은혜와 은총을 마음껏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