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사랑하는 주님 앞에 (220장)
이사야 56장 “하나님의 시선”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일까요? 관용적인 민족인가요? 아니면 배타적인 민족인가요? 사실 상당히 배타적인 민족이에요. 물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강대국들이었고 문화적으로 번성한 나라들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작은 나라에 불과했지요. 고대에서 문화와 종교는 떨어질 수 없었습니다. 강대국의 세련된 문화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자칫 다른 나라의 문화나 가치관을 접할 경우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독특하고 고유한 신앙을 지키기위해서는 배타적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 이사야 5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3절입니다.
(사 56:3, 개정)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그의 백성 중에서 갈라내시기 않으시겠다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백성과 차별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성적 불구자조차도 하나님께서 용납을 하십니다. 고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환관 혹은 내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당시 이들은 중요한 정부 관직을 맡았습니다. 일예로 페르시아에서는 공물로 바쳐진 어린 소년들을 거세시키고 그들을 정부 관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습니다. 이들은 공무 집행할 가족도 없었고, 또한 후사를 남길 수도 없기 때문에 반역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어찌보면 불쌍한 사람들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같은 이방인조차도 이스라엘 백성과 차별없이 받아주시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적인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 하나가지고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데, 이방인들을 자신들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겁니다.
우리들도 나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습니다. 내 시각, 내 가치관, 내 생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사랑하기 어렵습니다. 아니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무지 나와는 맞지도 않고 어울릴수가 없는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5절입니다.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여기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은 저주입니다. 당시 환관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포로로 끌려와서 거세를 당하고 일하는 기계로 교육을 받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탁월하게 공무를 수행해봤자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고대에서 후사가 중요한 이유는 그들을 기억해 주는 후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환관들은 불쌍하다 살다가 죽어봤자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5절에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비록 그들에게 자녀가 없지만, 여호와께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끊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토록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냐면, 심지어 하나님 본인이 세우신 규칙마저 깨어버릴 만큼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신명기 23장 1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예, 이미 하나님께서 성적 불구자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정한 규칙마저 깨버리시면서 그들을 받아들이십니다.
7절입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제단에서 기꺼이 받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거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아무나 받으라는 말은 아니겠죠. 6절에 기록되었듯이, 여호와와 연합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안식일을 지키는 이방인이라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즉, 여호와께 나아오는 자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고 품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바라볼 때에 내 시각, 내 가치관, 내 판단으로 봅니다. 그러면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어요.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 만큼이나, 그 사람을 나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 만큼이나 그 사람도 나를 사랑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내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사람을 바라볼 때,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제목
1. 평소 기도하지 않던 이를 위해
2. 주일예배와 예배를 섬기는 이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