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183장)
이사야 51장 “깰지어다”
불의한 것에 적응을 해버리면 무섭습니다. 불의한 것을 나중에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구원자이십니다. 그렇게 들어왔고 고백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어지지가 않는거에요. 왜냐하면 상황과 현실을 보고 있으면 뭐가 나아지는 게 없었습니다. 이사야의 지속적인 권면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구원과 은혜가 자신들에게 임할 것을 믿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휘어잡은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사야가 외칩니다. 뿌리부터 다시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의 뿌리가 어디인가요? 아브라함이죠. 2절입니다.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백성의 뿌리이죠. 희망이 없던 사람이지요. 고대에서 자녀가 없었다는 것은 저주였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후손이 민족을 이루고 창성하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자에게 희망을 가져다 준 분임을 이사야는 말합니다.
이어서 이사야가 한 가지 더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이사야는 강조합니다. 6절입니다.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이 땅에 있는 자들이 다 하루살이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루살이 같은 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붙잡으려 했습니다.
사람들이 불의한 것과 타협을 할 때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 체제 안에서 힘 있는 자들을 붙잡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기준이 아니라 힘 있는 자가 기준이 되는 거죠. 그래서 그들과 같이 있으면 안전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나를 지켜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6절에서 말씀합니다.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겨우 하루살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구원은 영원하고 하나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늘 들어왔습니다. 우리 모두 아멘으로 화답할 겁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안 일어나면 어떻하죠? 사람이 언제 기도를 중단하는지 아십니까? 포기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께 간구했는데,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사람은 지쳐요. 그리고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의 상태를 그저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9절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간절하면서도 한 맺힌 기도를 드립니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하나님을 향해 깨어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며 외치는 절규의 탄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하지요. 정의가 사라지고 절망뿐인 곳에서 처음에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 기도가 오래 지속되다보면 하나님께 불만 섞인 말이 나오기도 하지요. 분명 하나님께서 능력의 주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요. 9절에서 라합이 나오는데, 우리가 알고있는 성경 인물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라합이란 바다에 사는 괴물을 의미하며, 용과 함께 고대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괴물입니다. 본문에서 라합의 의미는 이집트를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괴물들을 무찌르는 강하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가 보이지 않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신가하는 의심이 듭니다. 그리고 절망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지속되다보면 사람은 누구나 절망합니다. 다만 개인차가 있을 뿐이에요. 보다 일찍 절망하는 사람이 있거나, 조금 더 희망을 끈을 오래 잡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죠?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절망 앞에 그저 포기하고 단념하고 타협하며 살아야 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희망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12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며 풀 같이 될 사람의 아들을 두려워하느냐』
12절에 보면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나 곧 나’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강조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한 희망이요,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16절 하반 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그러나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보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의 권세를 두려워했지요. 한낱 풀에 지나지 않는 자들을 영존하시는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의지했습니다.
17절에 재미있는 반전의 표현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십니다. 이전에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던 백성들이 하나님께 ‘깨어나소서!’라고 호소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의 백성들에게 “깨어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안 잠든 적이 없으십니다.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만한 적절한 시간을 기다려 오셨습니다. 이제 그 구원의 때가 이르렀고, 백성들이 깨어날 때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는 그들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졸고 계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졸고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깨어나야 할 자들은 그들이었습니다. 이시간 우리가 기도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왜 포기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이시간도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기도제목
1. 틴즈 비전트립을 위해
2. 주일예배 수료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