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찬송가 202장)
말씀 : 마태복음 13장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으로 특별히 하나님나라 천국에 대한 메시지 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시고 또 그 비유를 풀어주시기에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11절과 12절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지금 나와 같이 있는 너희들에게만 허락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야, 있는 자는 받아서 더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자는 그 있는것도 빼았기게 될꺼야.”
이 예수님의 말씀만 보면 예수님이 진리를 일부러 감추시고 그래서 진리를 모르는 이들에게서 그나마 있는 것마져 빼앗아 버리겠다고 볼수 있는 말씀입니다. 있는 이는 더 누리고 없는 이는 더 빼았기는 오늘날의 불평등한 사회를 예수님이 인정하시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기에 왜 예수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지 우리는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굴까요? 없어서 다 빼앗길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14절과 15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을 인용한 것인데, 이말씀은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소명을 주시는 중에 백성이 완악하다는 것을 꾸짖는 내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완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악해져서 하나님이 말해도 듣지 않고 보여주어도 안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실 그때에 이런 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악하게 하여 말씀을 들려주어도, 기적을 보여주어도 일부러 거부하고 있는 이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지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유 그것을 15절에서는 예수님의 말씀때문에 고침을 받을까봐 입니다. 한낱 나사렛의 청년에 불과한 예술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겁이나서 두려워서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약의 메시지가 가리키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고도 의지적으로 예수님을 멀리하고 배척하였으며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 예 당시 종교적 기득권층인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천국의 비밀을 그들은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의지적으로 멀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천국의 비밀을 아는 이는 누구를 말합니까? 좋은땅에 뿌려진 씨를 가진 사람입니다. 2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이기에 자연스럽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이는 말씀을 듣는자가 아니라 듣고 깨달은 자입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제사장은 말씀을 들어서 보아서 안자들이지만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 의지적으로 주도적으로 깨달음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천국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전혀 보지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그 천국이 이미 자라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통해 천국이 단순히 어떤 장소가 아니라 우리안에서 우리와 함께 커가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영적으로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천국을 나의 것으로 삼기위해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합니다.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가 이어지는 천국의 비유에 들어있습니다. 감추인보화, 숨은 진주, 그물속의 물고기와 같이 좋은 것이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차지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붙들어야 하는 최고의 가치임을 보여줍니다.
이것을 알았습니다. 보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53절이하를 보시면 정작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험이 이 영적인 한발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들도 압니다. 하나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은 가족입니다. 이 경험이 지금 경험한 이 말씀을 막습니다. 이 경험이 예수님의 능력도 제한하게 합니다.
이들이 누구를 말하는 것 같습니까? 천국의 비밀을 보아도 들어도 눈을 감고 귀를 막아 적극적으로 멀리했던 종교지도자들의 행태와 너무나도 같음을 봅니다. 자신의 틀,자신의 지식, 자신의 경험으로 하나님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이 같습니다. 그틀에 갇혀서 정작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야가 눈앞에 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종교적 열심은 더 많아졌는데,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이가 적습니다. 초대교회의 때보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더 커지고 더욱더 온전해졌는데 그것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많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제사장과 같은 이들은 더 많아졌는데, 정작 주의 제자는 그리 많아보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의 말씀을 듣고 깨달는 좋은 땅이 되시길 바랍니다. 확장되는 천국안에서 천국시민이 누리는 은혜를 지금 이순간에도 누리는 온전한 자녀가 되시길 바랍니다. 내 경험때문에 진리를 왜곡하고 의지적으로 멀리하는 자가 아닌, 예수님을 온힘다해 온맘다해 따르며,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드림으로 우리의 경험을 초월하는 은총을 경험하는 주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새벽 이러한 다짐을 통해 주님께 한발 더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