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행군 나팔 소리에 (360장)
디모데후서 3장 “경건의 능력”
디모데후서는 저희가 아는 성경의 바울 서신 중 가장 마지막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서신을 마지막으로 하여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디모데후서를 바울의 유서이다, 마지막 지침서이다 등으로 표현을 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바울 서신과는 달리 그 표현이 조금은 직설적이고, 단호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인생의 노년을 지나고 있는 바울이 젊은 디모데와 후배 사역자들에게 정확한 교리와 함께 꼭 하여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주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봉독하신 디모데후서 3장 앞부분에서는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아주 세심하게 나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가 주일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며 많은 은혜를 받고 있는 데, 담임목사님께서도 계속 말씀하시듯이, 말세에 일어나는 현상은 무슨 일곱 나팔이나 일곱 대접의 재앙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저희가 회개하지 않음으로 인해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들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한다는 것, 교만하고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한다. 거룩하지 아니하다. 무정하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한다. 절제하지 못 한다.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한다. 조급하다. 자만하다. 쾌락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바다가 핏물로 바뀌고, 산이 흔들리며 지진이 나는 것, 아니 심지어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보다도 더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가 사는 삶 속에 일반적으로 흔히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어쩌면 말세라는 것 자체가 저희가 저희의 죄 지음으로 인해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는 심판의 날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말씀 5절에서 더욱 깊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 위의 다른 현상들은 몰라도, 이 부분만은 바로 저희 그리스도인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말세에 저희 그리스도인들마저 그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또 경건의 모양을 갖춘 저희 그리스도인들이 그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그리스도인마저도 그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게 된 데에는 오늘 본문에서 약간의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로 1절에 나오는 구절,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통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디모데후서가 쓰인 연도는 AD 60년,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가 가장 심할 때였습니다. 어쩌면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처참한 박해가 막 시작되는 때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이 때에는 로마시내 대부분이 불타는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황제 네로는 이를 그리스도인들의 탓으로 돌리고 극한 처형을 시작합니다. 바울도 이때 다시 옥에 갇히게 되고, 이런 일들을 직접 듣고 목격하면서 디모데후서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서신에 나오는 고통의 때라는 것은 바로 그 시대의 정말 실질적인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디모데후서 4장 17절,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단순한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사자의 밥이 되었던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때에,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경건의 모양만 가진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러한 고통의 때가 아닌 그냥 평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또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한다는 것, 교만하고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한다. 거룩하지 아니하다. 무정하다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한다. 절제하지 못 한다.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한다. 조급하다. 자만하다. 쾌락을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한다.
이러한 것들... 어떻게 보면 저희가 무슨 목숨을 걸어야만, 아니면 큰 금전적인 손실을 보거나, 자신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켜야만, 지킬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냥 그 순간순간 참아내고, 조금만 희생하면 다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오히려, “요즘 세상에 너무 안 그러면 안 돼.” 혹은 “남들도 다 그렇게 살아...” “뭐, 나 같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심지어는 “너무 율법적인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으셔”. 이렇게 변명을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처럼 경건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경건”을 Godliness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경건을 히브리어로는 “하시드”라고 하는 데 위로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교회와 세상에서는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삶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디모데후서가 쓰인 헬라어로는 “유세베이아”라고 하는 데, 이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공경의 태도, 즉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성도의 자세를 말한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본문 12절에서는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구절처럼 경건한 삶을 살아가다 보면,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러한 박해도 없고, 말세에 고통의 때도 아닌 데... 그런데도 그 능력을 부인하고, 제대로 발휘하지 못 합니다.
왜 일까요? 혹시 그 능력이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인지 몰라서인지는 아닐까요?
오늘 본문 중, 저희가 가장 많이 듣고 외우는 구절, 16절, 17절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미 그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경을 한번이라도 읽고 묵상한 사람이라면 경건의 능력을 반드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능력이 부족하다면 성경을 읽으며 묵상함으로 그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가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부끄러운 경험을 나누면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몇 년 전 저희 사무실에 저와 정말 성격이나 업무나 여러 가지로 잘 맞지 않는 직원이 있었습니다. 회의 때마다 싸우게 되고, 사적인 모임에서도 그다지 서로에게 편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이른 아침 비행기로 함께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출장을 같이 가게 되면 같이가는 사람과 체크인 카운터에서 만나거나 게이트 앞에서 만나거나 하는 데, 그 사람이나 나나 서로 편하지 않은지라 별다른 약속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침에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에서 내리는 데, 바로 제 앞 택시에서 그 사람이 내리는 것입니다.
아는 체를 할까 하다가… 에이 뭐 아침부터 서로 기분 상할 일 없지.. 하고 모른 척을 했습니다. 사실 도망을 가서 다른 체크인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IMMIGRATION을 향하는 데, 또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출장을 많이 다녀서 마일리지가 쌓여 이코노미를 타도 비즈니스 라운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빨리 라운지에 가서 혼자 아침도 먹고 좀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은 저만큼 마일리지가 없어서 라운지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아마 게이트에 가서 거기서 혼자 기다리거나 다른 곳에서 혼자 아침을 먹을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아는 척을 하고, 제가 라운지에 1명을 더 초대할 수 있으니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원래 성격이 까칠하고 말도 대충하는 사람이라서, 당연히 싫다고, 저보고 혼자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냥 꾹 참고, “아니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했더니, 못 이기는 척하면서 라운지로 들어 왔습니다.
비행기 이륙시간도 많이 남았고 해서, 아침식사를 가지고 와서 같이 먹자고 하니, 대뜸 저 혼자나 먹으라고 합니다. 이제 저도 기분이 확 상해 버렸습니다.
알았다고 하면서 식사하기 전 잠깐 어쩌면 습관적으로 기도를 하는 데… 그 때 갑자기 하나님께서 저에게 “정기야.. 잘 했다. 참 잘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저는 교회에서 선교부장이다, 청년요셉이다, 가정교회다 정말 제가 생각해도 수많은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주위에서도 “홍집사 참 수고 많다”고 격려들을 해 주시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는 아무 이야기를 안 하시던 하나님께서, 그냥 마음에 안 내키는 사람을 라운지에 데리고 들어온 것, 그 것도 무슨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깐 참아 주는 것뿐인데, 이런 일에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하시는 것 이였습니다.
사랑하는 나눔과 섬김의 교회 새벽기도를 나온 여러분. 어쩌면 저희는 경건의 능력을 너무 거창한 데서 찾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치 말세의 의미를 무슨 거창한 천재지변에서 찾는 것처럼, 우리가 경건해야 된다는 것을,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무슨 큰일을 해야 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삶 속에서 아주 작은 일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을 것 같은 행동을 해 나아가는 것, 어쩌면 그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또 우리가 갖추고 발휘해야 할 경건의 능력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찬양하시고, 또 다음 장, 디모데후서 4장 7절에 나오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말이... 무슨 순교를 하거나, 많은 무리를 전도를 하거나, 큰 기적으로 일으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한 순간 한 순간, 아주 작은 싸움 중에도 선하게 싸우고 그 믿음을 지킨 바울의 고백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이렇게 경건의 능력으로 늘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시간 오늘 함께 묵상하신 말씀을 가지고, 더욱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다짐하시면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