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나의 갈 길 다가도록 (384장)
시편 119편 65-120절 “고난이 유익이라”
71절.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66절. 시인이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쳐달라 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68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시인으로 하여금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례들을 배우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이 무엇입니까? 67절. 시인이 현재 당하고 있는 ‘고난’으로 인함이었습니다.
보통 시편의 구도를 살펴 보시면, ‘나’와 ‘저희, 그들’ 사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단지 구분되어 나올 뿐 아니라 ‘저희, 그들’에 의한 고난과 핍박이 일어나기까지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의인 ‘나’는 ‘저희와 그들’로부터 애매한 고난과 징벌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시편 전반에 걸친 인물 간 구도입니다. 86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이유 없는 이 핍박과 고난은. 85절. 교만한 자들과. 웅덩이가 원문에는 복수로 쓰였으니 한 번의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여호와는 시인으로 하여금 ‘저희와 그들’에 의하여 철저히 당하도록 허락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겉으로 볼 때에, 당연히 서로 간의 다툼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불의한 자들에 의한 시인의 애매한 고난으로만 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나 실상 이 싸움은 시인과 대적들의 싸움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무고한 고난을 허락하신 여호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이 둘의 싸움은 적들과 의인의 싸움이 아니게 됩니다. 여호와와 대적들 간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인’을 공격하는 ‘저희와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는 거지요. 이것이 의인인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죄로 인한 고난이든지, 적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인한 핍박이든지, 환경을 통해서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든지, 성도에게 있어 싸움은 더 이상 혈과 육의 싸움이 되질 않는 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편의 구도가, 시편을 읽고 있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겁니다. 시인과 함께 애매한 고난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또한 시편에서의 의인처럼 주님께 78절의 탄식을 올리게 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80절.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84절.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 한 마디로 ‘주님, 왜 저로 하여금, 우리 가족으로 하여금 이런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까? 왜 이런 수치를 당해야 합니까?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나를 공격하는 저들을 속히 망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니더라도, 이 고난이 좀 빨리 지나가길 원합니다‘의 기도가 우리의 삶에 있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는 시인의 실존적 이 질문에 하나님은 답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시인은 앞서 그 해답을 스스로 찾아낸 듯 보입니다. 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절.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여기서 ‘좋으니이다‘를 개역성경은 ‘승하니이다‘로 번역하였는데 ’뛰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시인은 ’천천 금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보다도 주님의 이 율법이 승함을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뛰어남을 찬양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지금까지 애매하게 받는 이 고난들을 무엇을 통하여 통과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또한 아직 남아있는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천천 금은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가족이겠습니까? 위로는 되겠지요. 그러나 진짜 위로와 평안은 아닙니다. 바로 주님의 입의 법이었습니다. 주야로 묵상했던 이 율례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시인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라멧연 (89-96절)
92절.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고난 중에 시인은 거듭 자신이 말씀을 소망하고 즐거워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93절.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도 노래하고 있습니다. 95절. 고난 중에 시인은 한 단계 더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다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고백을 드린 시인이 무엇에 근거하여 노래하고 있는 지가 저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바로 94절. 나는 주의 것이오니 에요. 여기서 ‘주의 소유’라는 것은 나는 언약 백성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시인 자신은 고난 중에서라도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기억하였다는 겁니다. 88절 상반절에서도.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여전히 시인은 철저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 사랑에 근거하여 자기를 살려 달라 구하였을 뿐입니다.
멤연(97-104절)
97절. 그렇게 주의 법을 사랑하게 되니 98절. 주의 계명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였으며 99절 주의 증거들이 나를 모든 스승보다 낫게 하였으며 100절. 주의 법도들이 나를 노인보다 명철하게 하였으며 101절. 주의 말씀이 나를 악한 길로 가지 않게 하였으며 102절에서는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다 합니다. 103절. 말씀의 맛을 경험케 하셨으며. 104절. 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게 되었음을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눈연(105-112절)
105절의 “등”과 “빛”은 동의어입니다. 주의 말씀은 어둠을 물리친다는 것이지요. 108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는 의역하자면 ‘내 입으로 기꺼이 드리는 찬양’이 됩니다. 109절.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는 찾아보니 ‘내 영혼이 내 손바닥 안에 있다’입니다. 이는 원수들의 끊임없는 공격으로 시인을 해하고자 하였기에 ‘위협’에 처해있는 자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112절.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여기서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는 찾아보니 ~할 마음이 생기도록 하다.로 나왔습니다. 굳이 의역해보자면,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할 마음이 생기도록 하다.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겁니다.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할 마음이 생기도록 하였느냐?입니다. 111절. 고난 가운데, 주의 증거들을 영원히 기업으로 상속받았음을 시인이 알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난 가운데, 그동안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을. 시인이 본겁니다. 그동안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가 고난 속에 피어나고 있음을 시인이 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 노래할 수 밖에 없겠지요. 지금의 고난도 시인에게는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할 마음이 생기도록 할 뿐 인 겁니다.
사멕연(113-120절)
이내 시인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115절. 행악자들에게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117절. 나를 붙드소서. 찾아보니. ‘강건케 하다’입니다. 즉, 나를 더욱 강건케 하여 주셔서 다시 당신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겠다. 노래합니다.
이처럼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이름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할 때에, 주님! 하나님의 이름 외에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언약백성답게 살게 하옵소서. 우리는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치 아니합니다. 우리는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완전히 망하지 않는 언약백성들입니다. 이 새벽, 예수의 남은 고난과 죽음을 함께 짊어질 때 하늘의 기쁨과 위로를 부어 주옵소서. 그리하여 예수의 생명이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가정 위에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 기도제목 -
1.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발견하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2.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온전히 세우며, 열방을 제자 삼는 사역을 잘 감당하는 나눔과 섬김의 교회 되게 하옵소서.
3. 지진 피해로 고통 중에 있는 일본과 에콰도르를 돌봐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