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 / 달고 오묘한 그 말씀(200장)
시편 119편 1-64절 / “여호와의 율법”
시편 119편은 알파벳시입니다. 히브리어에는 총 22개의 자음이 있습니다. 각 자음마다 8개의 절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히브리어 자음 첫 번째가 ‘알렙’입니다. 1절부터 8절까지의 각 절의 첫 글자가 히브리어로 보면 ‘알렙’이라는 자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9절부터 16절까지는 역시 각 절의 첫 글자가 ‘베트’라는 자음으로 시작합니다. 17절부터 24절까지는 ‘김멜’이라는 자음을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각 자음으로 시작하는 8개의 절이 하나의 연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성경책에 보시면 8개의 절마다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를 해서 구분을 해놓은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22개의 자음이 각각 8개의 절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2 곱하기 8하면 176이죠. 그래서 시편 119편은 총 176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자음으로 시작하는 절을 8개나 만든 것도 놀라운데, 히브리어 모든 자음으로 이같이 한 것을 보면 놀랍습니다. 시편 119편은 그야말로 히브리 시편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학적인 장르를 사용하면서 그 분량도 가장 긴 이 시편에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바로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편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칭송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간략하게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19편 1절을 보면 시편 119편을 관통하는 중심주제가 등장합니다. 시편 119편 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겠지요.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119:1).” 이 말씀은 시인의 삶의 고백과도 같습니다. 시인은 자기 경험에서 말씀을 순종하여 지키는 것이 형통의 지름길임을 뼈저리게 경험했을 겁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사는 자가 복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어찌 보면 참 단순한 삶의 원리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원리를 깨닫기 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다보니 무엇인가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것이 명예가 되었든지 물질이 되었든지 힘이 되었든지 불완전한 나의 삶에 안정을 가져다 줄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것은 얻으면 잠시 잠깐의 안정감을 얻습니다. 만족감을 누립니다. 그러나 그 안정감이란 결코 오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예도 물질도 힘도 결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갖 문제와 불확실함 가운데서 우리가 의지할 바는 하나님의 말씀 밖에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 14절을 보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들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14절).” 이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으면 이렇습니다. “주님의 교훈을 따르는 이 기쁨은, 큰 재산을 가지는 것보다 더 큽니다.(14절/새번역)” 큰 재산을 가져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큰 재산을 가지는 것을 사람들은 사모합니다. 그리고 꿈꿉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교훈을 따르는 기쁨이 그 모든 것을 가지는 것 보다 더 큰 기쁨이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집에 값비싼 진주가 있는데, 그것은 깨닫지 못하고 진주를 찾아 방황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 세상 가장 큰 기쁨은 주님의 말씀 안에 있음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말씀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합니다.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17절).” 기도자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지칭합니다. 이것은 첫 번째로 하나님에 대한 굴복을 뜻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종은 어디인가에 속한 존재입니다. 종은 주체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의존해 있습니다. 주인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얻는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을 나그네라고 지칭합니다. 19절을 볼까요?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19절).” 우리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땅에 속해서 살아가지만 이 땅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그네 같은 삶이라는 것이 현실도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무가치하게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처럼 나그네의 마음을 가지고 현실에 집착하지 않을 때에 우리는 세상을 제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25절을 보겠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가게 하소서(25절).” 앞부분을 새번역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 영혼이 진토 속에서 뒹구니(새번역).”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어떤 면에서는 먼지 구덩이에서 뒹구는 것 같은 삶입니다. 이러한 현실 가운데 어떻게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겠습니까?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가게 하소서(25절).” 25절의 기도 밖에는 우리가 할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을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으로 나를 세우소서(28절).” 답답한 현실 가운데 마치 우리의 영혼이 눌리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의 영혼이 녹아버리는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현실가운데 무엇이 우리에게 새 힘을 주겠습니까? 무엇이 억눌린 우리의 영혼을 다시 세우겠습니까? 주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8절).” 28절의 고백이 오늘 하루의 고백이 되기 원합니다. 아니 우리 평생의 고백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께 약속하셨으니 약속대로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오늘 하루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