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찬송458장)
말씀 : 오바댜 1장 1~21
어떤 한 사람이 응급상황이나 위급상황을 겪고 있을 때 그 곁에 있는 사람이 생명에 크게 위협을 받지 않는 한에 있어서 돕도록 하는 법이 있습니다. 만약 돕지 않으면 그 사람이 나중에 벌금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법을 제정한 취지는 이 법의 이름대로 당연히 선한 사마리아인을 많이 양산해 내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을 제정해야 할 만큼 오늘 우리 사회 안에 선한 사마리아인을 찾아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길을 가다가 누군가가 어려움을 당하고 위급한 상황을 겪고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그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이 사람의 양심이고 상식이지 않겠습니까? 구해주고 도와주고 돌보아 주고 생명의 위협을 겪고 있는 사람이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것은 법이 정해야 될 것이 아니라 양심의 문제이고 특별히 신앙인은 신앙양심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돕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오바댜 말씀에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을 눈감고 있는자, 이웃이 환난 당하는 그때에 멀찌감치 서 있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의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오바댜입니다. 선지자 오바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는 남유다에서 예언했던 사람이고 예레미야와 에스겔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 정도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예레미야서나 에스겔서에 오바댜서의 내용이 거의 비슷하게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는 그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586년 남유다가 망한 이후에 기록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특이하게도 에돔족속입니다. 에돔의 조상은 올라가고 올라가보면 에서를 만납니다. 에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야곱의 쌍둥이 형제입니다. 원래는 에서가 형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에서가 장자권을 받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형을 속였습니다. 아버지도 속였습니다. 장자권을 빼앗아 갔습니다. 하지만 에서와 야곱을 아는 그 어떤 사람도 에서를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동생에게 팔아치웠습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 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 날 그는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동생의 장막에 거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기 때문입니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천혜의 요새 세일산을 만납니다. 그곳에 요새를 만들고 거했습니다. 원래 그는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 그의 자손들은 호전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지금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하나님은 에돔족속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3절과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너의 마음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은 마음이 교만했습니다. 그들이 교만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요새속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일산은 천혜의 요새입니다. 사람들이 그 산에 올라가서 에돔족속을 쳐서 이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 요새를 만들고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가 나를 능히 끌어내리겠느냐? 나는 독수리 같다. 나는 높은 곳에 있다. 누가 능히 우리를 이기겠느냐? 그런데 이들이 간과한 것, 이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습니다. 산을 만든 분이 누구십니까? 세일 산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요새를 지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산을 만든 분 하나님께서 끌어내리면 어쩔 수 없이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산을 만든 것이 아니고 도리어 산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미련하게도 창조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의지하는 자, 돈을 만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 건강을 의지하는 자는 그 건강을 주신 하나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이 짓고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창조주를 의지하지 않고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을 의지하는 자는 참으로 미련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에돔족속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요새를 의지했던 교만하고 미련한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교만을 낮추기 위하여 심판하겠다 말씀하셨습니다.
에돔족속이 심판받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0절을 보시겠습니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에돔 족속이 형제의 민족 야곱족속을 포악하게 대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때문에 내가 너희를 멸절하겠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에돔이 야곱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족속들에게 어떤 일을 행했길래 하나님이 그들을 멸절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11절을 보십니다.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여기 11절에서 말하는 이방인과 외국인은 바벨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유다의 성문을 열었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기원전 586년 남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1차, 2차, 3차 침략해서 포로로 그들을 다 잡아갔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불탔습니다. 그들은 와서 마구 이스라엘 백성들 유다 족속들을 약탈해갔습니다.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다 싣고 바벨론으로 옮겨갔습니다. 많은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의 칼 아래 모두 다 죽임 당했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쇠사슬로 묶어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갔습니다.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렇게 유대가 멸망당하던 그날 다시 11절을 보시면 '네가 멀리 섰던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돔족속은 힘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호전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은 강력한 군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함께 한 핏줄 같은 피를 나눈 유다족속들이 고난당하는 그날에 그들은 멀리 서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형제의 고통과 아픔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
이 말씀을 미루어 보면 그들은 유다가 멸망당하는 그날에 입을 크게 벌려 기뻐하고 방관하고 즐거워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마음 속 깊이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였고 악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이 말씀을 거꾸로 미루어보면 그들은 유다백성들이 환난당하는 날에 들어가서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멀찌감치 서서 구경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당할 때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조롱하고 비웃었으며 오히려 바벨론과 함께 들어가서 그 재물에 손을 대는 자들이었습니다. 동족의 고통과 아픔을 자신들의 부를 취하는 이득의 시간으로 삼았던 그들 하나님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판하겠다고 공언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웠나니 네가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네가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무섭지 않습니까? 행하는 그대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멀찌감치 서 있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고통당하는 그날에 멀찌감치 서서 너를 돕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고통당하는 그날에 나도 함께 웃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너희들이 고통당하는 그 날에 내가 다른 민족을 일으켜서 너희들을 더 약탈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함께 이웃된 자들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이웃은 먼데 있지 않습니다. 가족이 우리의 이웃이고 형제가 우리의 이웃이고 부모가 우리의 이웃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 고통당하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가 손을 내밀어 구원하고 도와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들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습니까? 그들의 고통을 눈을 크게 뜨고 헤아려 보셔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고통받고 있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 내가 도울 수 있으면 이 긴급하고 비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힘껏 도와야 합니다.
교회가 해야 될 일이 이런 상황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는 것이고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까지 모으는 일에만 열중하겠습니까? 손을 내밀고 베풀고 흘려 보내는 일에 교회가 쓰임받아야 할 바로 이 때입니다. 이 때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흩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흩으신 이유는 주변 이웃을 돌아보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라는 하나님의 의무의 명령이 함께 깃들어 있는줄로 압니다. 이런 때일수록 주변과 이웃을 살펴보시고 기도로 돕고 물질로 돕고 우리의 손길과 발길로 도와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우린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셔서 멀찌감치 서 계시지 마시고 가까이 가서 힘껏 돕는 아버지 백성들 되셔서 심판의 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믿음의 백성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1) 내가 도울 수 없다는 이유를 먼저 생각하기 보다 도울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2) 전쟁으로 고통 받는 지역,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지역을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도움을 줄 방안을 모색하는 선교적 교회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