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찬송528장)
말씀 : 요나 1장 1~17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신 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어느 누구도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탕하게 행동하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숨겼다고 생각하고 죄를 은폐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고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기다려주시고 짐짓 모른채 하실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요나서에 나오는 주인공 요나도 바로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인지능력에 장애가 있는 요나,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을 깨닫는 지혜와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또한 사명을 망각한 자가 어떤 인생을 걷게 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기억하고 사명대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결단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에서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은 굉장히 부강하고 부유했던 나라였습니다. 기원전 8세기 그들은 여로보암 2세의 풍요로운 세월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는 기원전 8세기 그들에게 훌륭했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한꺼번에 보내주셨습니다. 호세아, 아모스, 요나가 그 세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기에 선지자 세 분을 한꺼번에 보내셨을까?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질이 풍요했기 때문에 부족한것 없이 다 가졌기 때문에 그들은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을 겁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듣고 깨닫고 돌이키라고... 호세아,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에서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해외에 나가서 선교했던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시는 첫 장면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2절 말씀에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동사가 나옵니다. 일어나 가서 외치라.
동사 세 개가 나오는데 명확한 하나님의 마음이 강렬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은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였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앗시리아는 북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지자는 이런 여러가지 정황이나 상황을 고려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명따라 행야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여러 선지자들은 인간적인 관계에 매이지 않습니다.
호세아를 보십시오.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하지 않습니까? 방탕한 여인과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명령했고 호세아 선지자는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예레미야,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서 예언합니다. 이 말을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할 것을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가지 고난을 당할 것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매맞고 갇히고 생명의 위협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이기 때문에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예언했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매이지 않고 자기 생각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단순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선지자의 삶입니다.
오직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하는 것이 선지자입니다.
오늘 우리도 크건 작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니다. 먼저 믿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일어나 가서 외치라! 이런 사명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에게 주신 크고 작은 사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다면 그 사명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집니다.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하는 가치를 가집니다. 저는 장가가야 합니다. 소도 샀습니다. 이런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는... 돌아보면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명령을 얼마나 많이 거부했는지 모릅니다. 여러가지 핑계를 대면서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핑계대는 자를 반드시 그 사명의 자리로 다시 불러 오십니다.
요나가 그러했습니다. 사명받은 요나, 사명을 거부하고 자기 길로 나아갑니다. 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하나님은 일어나 가서 외치라 했을 때 요나도 일어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일어난 목적이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났습니다. 짧은 3절 한 절 말씀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한다면 피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인생입니다. 이건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나무 뒤에 숨어서 하나님을 피하려고 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손바닥 보듯이 다 알고 계십니다. 미련한 우리가 죄 짓고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교만이고 착각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기 위해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오른 자에게 착각하기 딱 좋은 상황이 닥칩니다.
오늘 3절 말씀에 보면 눈여겨 볼 단어가 하나 등장하는데 '마침' 이라는 단어입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그에게 시간 맞춰 온것입니다. 사탄이 요나에게 준 착각입니다. 거 봐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피하니 이렇게 시간 맞춰 배도 오지 않느냐? 마침 배가 오는 것.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보낸 배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피하고 다른 일을 하면 생각보다 일이 잘 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려갑니다. 돈도 많이 벌리고 인간관계도 잘 풀립니다.
때 마침 얼마나 좋은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생각하셔야 됩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라는 사실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3절 말씀을 보면 '내려가다'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히브리어 '야라드' 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피하는 자 '야라드' 내려가는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야라드가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 나옵니다. 배에 올랐더라. 우리 말에는 올랐더라고 표현하지만 히브리어에는 내려가다 라는 단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라드' 내려가다 라는 말은 3절 말씀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5절 말씀도 보십시오. 5절에도 이렇게 나옵니다.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배 밑바닥 까지 내려갑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는 자 마침 배를 잡아 탔지만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갔습니다. 야라드 야라드 또 야라드 합니다. 인생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인생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저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명을 피하는 것은 이렇게 영적인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인생 밑바닥으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4절과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명을 피하는 자 밑바닥으로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자. 영적인 감각이 둔해집니다. 배가 흔들려서 폭풍 때문에 거의 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노하셨습니다. 요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 선장을 비롯해서 모든 선원들이 울고 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신들에게 구하고 또 구합니다. 물건을 내 던집니다. 하지만 요나는 무심했습니다. 평안 가운데 깊이 잠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영적인 무지입니다. 주변에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 둔감한 사람 요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도 환경에 예민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서 나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민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변 사람들이 도리어 요나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상황을 더 빨리 감지 했습니다. 배가 가라앉는 것을 감지 했습니다.
하지만 요나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잠만 잤습니다.
이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크리스찬인 우리가 더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감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대의 선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이 크리스찬에게 물어야 하고 ,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크리스찬이 답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무지 한 사람은 도리어 시대의 흐름에 정신없이 좇아갑니다. 타락한 시대 정신에 타협하며 살아갑니다. 시대를 깨우는 크리스찬으로 살아야 합니다.
위기에 처하자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데 요나는 깊이 잠들어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제비가 뽑혔습니다. 요나가 뽑혔습니다. 요나는 드디어 이 문제가 자신 탓임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고집스럽게 자신을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합니다. 언듯 보면 멋져 보입니다. 책임지려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고집스러운 만용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나 때문에 이 큰 풍랑을 일으키셨군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엎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 풍랑을 잠재워주십시오. 여기 있는 이 선원들은 죄가 없습니다. 풍랑을 잠재워 주십시오. 엎드려 구하고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사과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희생의 대가를 치르더라도 책임있게 행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책임있는 행동의 시작은 사과하는 것이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책임지는 행동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행하는 것이지 자기 멋대로 행하는 것은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요나의 모습을 통해서 누가 보이십니까? 우리 자신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초의 사명을 기억하신다면 사명대로 행해야 됩니다. 사람을 섬기는 사명, 베푸는 사명, 돌보는 사명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각양 여러가지 달란트로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부여받았다면 사명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내실 것이고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집스러운 요나, 영적인 무감각에 빠진 요나,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간 요나를 다시 되돌려 놓으십니다.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영적 무지와 고집스러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셨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삼일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를 힘빼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릎 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캄캄한 물고기 뱃속이 우리 눈 앞에 다가오기 전에 우린 하나님 앞에 사명을 발견하고 돌아가고 무릎 꿇는 하나님 자녀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살아가시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발견하고 사명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자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1) 일이 아무리 잘 되더라도, 상황이 좋아지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유혹임을 알게 하소서.
2) 실수를 만회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고, 자신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책임있게 사는 크리스찬의 모습임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