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 6장 1-15절
찬양: 십자가 그사랑 멀리 떠나서, 주 예수 보다도
이스라엘의 모습은 참혹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4:23절)
마치 창세기에서 혼돈과 공허속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 예레미야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처럼... 혼동과 공허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 모든 빛이 사라저 버린 암흑의 시대...
그러한 시대를 보시며 하나님은 그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슬프고, 아프다.. 내 마음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4:19-22)
백성들이 전쟁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경보소리를 듣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그들이 국제 정세에 눈이 어두워서가 아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4:22, 5:21)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현실속에서도 그들의 문제를 알지 못했고, 어떠한 대책도 세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4장에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예레미야 성 안으로 피하라”라고 말했는데, 오늘 본문 6장에 이르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피하라!”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 더욱 가까워지고, 긴박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별히 예레미야는 “베냐민 자손들아..”라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데, 생각해보면, 베냐민 지파는 사울의 후손으로 대부분 위 북 이스라엘로 올라갔었지요. 그러니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과는 달린 다윗의 언약을 믿으며 남 유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조차도 그곳에서는 안전할 수 없을 만큼 심판이 긴급하게 임박한 것입니다.
슬픈날 맑은 하늘은 더욱 마음을 먹먹하게 하고 서글프게 하는 것러럼,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을 “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이라고 부르시는 마음은 어쩌면 더욱 슬픈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시온(신명기 16:6), 그곳에 목자들이 쳐들어 옵니다. 이 목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을 돌봐주는 목자가 아니라, 그들을 치기 위해 오는 바벨론입니다. 왜 하나님은 “목자”라고 표현하셨을까요? 늑대도 아니고, 이리도 아니고.. “목자” 지켜주고 돌보아주는 의미로서 성경에서 쓰여지는 목자라는 이미지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4절과 5절을 보면 그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전략을 세우는데... 그런데 충격적인 장면이 등장합니다, 바로 6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기 위해 쳐들어 오는 적, 바벨론을 진두지휘하시는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전쟁을 누가 진두지휘 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원래 여호와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 그들 앞에 싸우=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당신의 백성들 앞에서 수많은 적들을 물리쳐주신 하나님이 이제는 그 방향을 돌려 오히려 그 백성을 치는 바벨론을 진두지휘 하신다. 바벨론은 그저 “목자”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것 뿐,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에을 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 바벨론의 군대의 대장이 되셨습니다. 대체 어떠한 모습이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해 대적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하였을까요?
6절은 그들 중에는 오직 포악한 것 뿐!이라고 말한다. 포악하다는 말은 주로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어나는 악한 태도를 말한다. 7절은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샘”으로 묘사한다. 샘이 그물을 솟구쳐냄같이... 그들의 악이 솟구쳐 올라오는데.. 폭력과 탈취, 질병과 살상이 끊이지 않는 것.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악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셨을까요?
예레미야 9-15절을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이다.
하나님은 철저한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는가 하면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 따는 자가 늘 남은 포도가 있는지를 철저히 살펴보는 것 같이 여호와의 포도원에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찾아보도록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말씀들을 보면 포도나무의 덩굴에서는 아무런 열매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예레미야의 결론은 한마디로 “재생불가! 절망!”
10절은 그들이 그렇게 되어버린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귀가 활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경고와 돌아오라 말씀하시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 아니 그들이 귀가 없어서가 아니라, 귀가 할례를 받지 못했기에.. 그들을 향한 사랑의 말씀이 그들에겐 어떻게요? 욕으로 들렸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귀는 할례 받지 못한 귀였기 때문...
사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는 알고 있지만, “귀의 할례”라는 말은 거의 나오지 않는 표현(행7:51)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보여주는 증표가 바로 할례였던 것이지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을 받아들여셔 순종하는 사람들, 그것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특별한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더 이상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고자 하시나, 문제는 그들이 치료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 백성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그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겼다. 그들의 상처 “세베르”는 심각해서 모든 것이 붕괴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를 쓸 만큼 심각했지만, 마치 뼈가 부러진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고칠 수 없었다(라파) 그래서 그들의 심각한 상태에 대해 정밀 검사도 하지 않고, 그냥 괜찮을 것이라고 잘못된 확신만 심어주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죄를 지어도 당장 벌을 받지 않으니.. 지금 괜찮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나 이 백성의 상처는 심각할 정도로 위독... 근본적인 대 수술이 요구되었다. 그들의 평강은 거짓된 평강이었던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귀!! 그것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출애굽기 15장 22-27절
들어도 듣지 못하는 절망.. 마라.. 쓴 물에.. “한 나무를 던져.. 그 물이 달게 되었다”
하나님만이 치료하실 수 있다. 절망적인 우리의 이 죄된 마음.. 쓴 뿌리와 열매밖에 낼 수 없는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만이 치료자가 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심판은 하나님의 최종적이 버림의 선언이 아니라, 그들을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징계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길 바랍니다. 징계를 주셔서라도 돌이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그 사랑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 확실한 사랑은 마라와 같은 마실 수 없는 물, 절망가운데 한 나무를 던지신 것과 같은 바로 자기의 몸을 던져 우리를 살게하신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를 붙들며, 오늘 그 사랑을 깨닫고 회개하며 주님께 돌아와 다시 그분의 말씀앞에 철저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 주여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오늘 우리의 삶을 향해 놓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돌이키시며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여 주님께 돌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 예수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고치시는 분이심을 기억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고, 우리의 교만함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 예레미야 말씀을 통해서 선포되는 주님의 마음을 더욱 깊이 깨달아, 공의와 정의가 무너진 이땅에 주님의 자녀로 공의와 정의를 베풀며 주님의 나라를 세워가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