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찬송가 289)
말씀 : 사무엘상 18:1~30
어제의 말씀을 통해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새로운 리더로 급부상하게된것을 묵상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러한 다윗을 알아가는 두 사람을 통해 오늘 말씀을 묵상하려 합니다.
오늘 말씀 1절과 29절의 말씀을 보시면 동일한 한 사람 다윗을 대하는 극과 극의 두사람이 등장합니다. 한명은 요나단이고, 한명은 사울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울왕의 이야기가 먼저나와야 하는 상황인데도, 간략하게나마 아들 요나단의 이야기가 먼저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의 핵심이 요나단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져야 함을 구조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기 바랍니다.
먼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라 할수 있는 다윗을 요나단은 어떻게 바라봅니까? 함께 1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마음으로 해석된 히브리어 네페쉬는 하나님이나 왕을 향한 순수하고 전인격적인 사랑과 충성의 정신을 가리킵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과 다윗이 대화하는 것을 보며,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이며, 얼마나 나라를 위하는 사람인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나라를 향한 같은 마음과 같은 비전을 알게되었기에 그들은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서로를 생명처럼 사랑할만큼, 가까와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비전이 같다면 신분을 초월해서, 형편을 초월해서 함께할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죠. 반면에 같은 사람 다윗을 두고 사울은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29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더욱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사울은 다윗을 평생의 대적으로 대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합니다. 백부장으로 삼고, 곧이어 천부장으로 승진시켜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위가 되게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들은 요나단처럼 정말 자식처럼 대해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속뜻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의 목적은 모두 다윗을 해하려는데 있었을 뿐입니다.
분명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에 대한 평가는 요나단이나 사울이나 같습니다. 지혜롭게 행함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다윗, 그리고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된 다윗, 이것이 당대의 다윗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하나님께도 충성하며 동시에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받는 이러한 모습을 모두가 닮기를 바라셨고, 요나단은 그러한 하나님의 바램처럼 다윗과 같은 마음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울은 그렇지 못했을까요?
사울의 이러한 변심을 10절에서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임하였다 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울이 정신없이 떠들어댔다고 그 모습을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울이 사탄으로 인해 미쳐버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말하는 것은 사울이 사탄으로 인해 이상행동을 하였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옳은 길을 벗어났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의미적으로 맞는 해석입니다.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의 해석은 사무엘상 16장 14절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16장 14절은 이렇게 말하비낟.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난 결과를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령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울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로인해 사울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이해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사울의 이상증세는 하나님이 사울을 떠났다는 직접적인 증거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증거를 다윗을 통해 하나님은 보여주고 계신 것이죠. 12절을 보면 사울은 그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있는 자신과 하나님이 함께하는 다윗을 보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사울은 다윗과 함께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면서 그를 경외합니다. 두려워했다는 말의 원어의 뜻이 일반적으로 신을 향한 경외심을 뜻할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사울은 분명 하나님의 부재를 알고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지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여기서 다른 결과를 찾습니다. 다윗을 거울삼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사람으로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제거함으로 여전히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려고 한 것입니다.
사울의 실패가 바로 여기에서 발견됩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윗을 통해, 그리고 아들 요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고 알려주십니다.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하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틀리게 해석하고 적용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마음의 주인을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으로 삼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시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과 요나단과 수많은 성도들의 행동을 틀리게 적용해버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새벽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요나단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사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이 나에게 어떻게 적용되고 있고,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확인해보기를 바랍니다. 어떤이는 동일한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사울과 같이 변해갑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를 일삼기도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정죄하는데 앞장서기도 합니다. 누가 보아도 잘못된 행동임에도 그것이 선지자적인 외침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깍아내리고, 사람들을 비참한 상황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기회를 주시고, 여전히 관심을 가져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시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고 경험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죠.
혹시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음을 함께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자리에 서계신다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할 사울을 찾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비판하고 정죄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사울을 끝까지 왕으로 존경하며, 왕으로서의 대우를 했던것처럼, 그들에게 있던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사랑과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생명을 나눌수 있는 지체들을 만나고 경험하고, 또한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금 깨닫도록 도움을 주는 제가되고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