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스가랴 5장 (스가랴의 환상중 6-7번째 환상)
찬양: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어린시절 가끔 꿈에 나왔던 하늘을 하는 양탄자가 아니라, 하늘늘 나는 두루마리입니다. 두루마기라는 것은 오늘로 말하면 “책”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스갸랴는 환상중에 어떤 한 책을 보았습니다. 그게 엄청난 큰 책이었지요. 장이 이십규빗, 광이 십규빗… 즉 가로가 9미터, 세로가 4.5미터나 되는 엄청나게 큰 두루마기.. 그런데 이 두루마리가 펼쳐진 상태로 날라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루마기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만약 두루마리가 날아다니며 세상을 저주해야 한다면, 사실 이스라엘의 법이었던 그 율법이 아니라, 당시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법이 돌아다니며 세상을 심판하고 저주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요? 쉽게 생각해서 오늘 우리나라의 법으로 모든 나라 미국과 프랑스와 러시아를 재판한다고 한다는 것과 같은거에요… 그런데 더 사실 말이 안되 보이는 것은, 이미 망했다는 것입니다. 망한 나라, 이스라엘의 법은 사실 사라진 것과 같은 것이기에 더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장차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데, 그 기준이 페르시아의 법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법을 어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초강국이 되어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의미일까요? 이 의미를 알게 위해서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질문은 과연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의 회복을 위해서 말입니다. 회복이라는 말은 바로 이전 어느시점으로의 되돌아감을 전제로 합니다. 즉 이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아담, 즉 타락이전의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나누던 완전한 교제를 위한 하나님의 요구,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할수 있었지만, 타락이후 이제 더이상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킬 능력이 그들에게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율법들을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을 향한, 그 완전한 교제를 위한 하나님의 기대는 변함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조금도 말이지요.. 날아다리는 두루마리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 돌아다니면서 세상을 저주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고 나누어야 하는 이 세상인데, 그렇지 않은 이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라는 것, 하나님앞에 죄인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로 그러한 모습을 직면하게 하며 좌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앞에 두손들고 나아오게 합니다.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바로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나님앞에 나아오게 합니다. 대체 내가 먼데 하나님은 나를 포기 하지 않는가?… 변하지 않는 정말스런 우리이지만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그 앞에 나아오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가운데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가 날아가는 것은 또한 바로 그러한 그들을 향해 기대를 반드시 이룰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와 요구의 성취, 그 율법의 성취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요구,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님은 율법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말씀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았다!는 하나님의 선언이요, 그렇기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하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단지 우리를 향한 무거운 율법적 요구를 주어서, 우리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라고 좌절을 맛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룩한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그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그 놀라운 은혜와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거룩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로 반드시 거룩한 자로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그 결단이 바로 4절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그냥 그런 자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앞에 항복하십시요. 두손들고 나아오십시요. 그 사랑에 항복하는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리고 난후 하나님은 또 하나의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5절부터 입니다. 무엇이 등장합니까? “에바”가 등장합니다. 에바라고 하는 것을 부피를 재는 큰 통입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통입니다. 그런데 장사꾼들은 이 에바를 속여서 팝니다. 이 에바안에 무엇인가를 넣어서 부피를 줄입니다. 그래서 이 에바는 욕심의 상징입니다. “온 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세상에 가득한 우리의 욕심.. 그리고 7절에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그 욕심을 향항 유혹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욕심의 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날아다니며 우리를 정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욕심”입니다. 더 갖고 싶고, 더 누리고 싶은 이 욕심.. 문제는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가진것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아내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남편으로 만족하지 못해요.
복음은 바로 이 욕심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 줍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리라” 어떤것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 그것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복음인 것입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의 통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만족”을 주신 것, 그것이 바로 기적중의 기적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이 우리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당신은 무엇때문에 그렇게 평안한가? 만족하는가?”
우리는 이 싸움, 이 욕심의 통이 다시 내 안에 있는 이 만족과 기쁨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싸워야 합니다. 8절 “그가 가로되 이는 악이라, 그 여인을 에바 속으로 던져 넣고 납 조각으로 아구리 위헤 던져 넣더라” 욕심이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이 에바의 입구를 납으로 때워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마음에 욕심이 일어나고, 그래서 미움과 시기, 원망과 불평이 생길때.. 우리는 이 스가랴의 환상을 기억해야 합니다. 9절에 보면 이 통속의 유혹하는 여자를 덮은 후, 시날땅 귀신의 처소로 옮겨놓습니다. 누가 하는가? 두 여인이 합니다. 이 두여인을 학자들은 교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이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욕심이 우리안에 다시 일어서지 않도록,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한눈팔지 않도록, 마음을 뺴앗기지 않도록, 서로를 꺠워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운데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그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주님앞에 나아오라..”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기쁨과 만족이 우리안에 충만하기를 원합니다. 서로를 격려해주고, 일으켜주는 공동체의 사귐의 역사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룩한 자로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안에 충만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 우리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 우리를 유혹하는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서로를 함께 깨워주고, 기도함으로 이 채워지지 않는 욕심속에 살아가지 않고, 주님이 주신 기쁨과 만족함을 누리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 욕심에 사로잡힌 이땅을 주님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전쟁과 전염병의 위협속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날아다니는 두루마리, 그 하나님의 말씀앞에, 이 땅이 회개함으로 다시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