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주 예수 넓은 사랑 (찬송497장)
말씀 : 하박국 1장 1~17
하박국 선지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기 직전에 남유다에서 예언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예언했던 시절은 선지자 예레미야와 거의 시대가 겹칩니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고통스러웠던 시절,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선지자, 그가 가졌던 심각한 고민들이 오늘 하박국 1장에서 있는 그대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선지자 하박국이 무엇 때문에 기도했을까요? 그가 기도한 것은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위정자들과 영적 지도자들로부터 각 가정에서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까지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습니다. 정치인들은 편 가르기에 여념이 없었고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영적으로 돌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덕적 타락과 율법이 무너진 것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이 나라를 고쳐주십시오.
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간구하며 엎드렸습니다.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일터에서도 그리고 왕이 있는 왕실에서도 영적 지도자들이 있는 성전에서도 한 마음이 되지 않고 끊임없는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고 율법은 해이해지고 상실되고 백성들 사이에 정의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시대에 저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하나님! 이 백성을 고쳐주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언반구 전혀 말씀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말하지 않습니까.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제가 이렇게 간구하고 엎드리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입니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렇게 답답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선지자 하박국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의 방향이 기도의 방법이 잘못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혀 그의 기도에 말씀하지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내가 듣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기도했습니다. 430년동안 하나님께 울부짖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처음부터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행동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기도의 제목대로 하나님은 움직여 주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때가 다르고 하나님의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즉시 지금 당장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때 가장 답답하고 가장 힘이 듭니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다를 때입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듣고 계신다는 사실, 이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믿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보다 지혜로우시고, 하나님이 나보다 지금 더 큰 것을 보고, 더 멀리 내다 보시고 계시는 분임을 믿는 믿음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의 때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시는 믿음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하박국 선지자가 고민하는 것입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하나님께서 드디어 선지자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이 너무 포악합니다. 하나님, 이 백성들이 변론과 분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고쳐주십시오. 그러자 하나님이 드디어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다. 그들이 이 나라를 집어 삼킬 것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이 나라의 백성들의 행태를 고쳐달라고 기도했지 어떻게 저렇게 악한 민족을 일으켜서 우리 민족을 심판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까?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바벨론은 포악하기 그지 없는 나라고 그 갈대아 민족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악한 자들 중에서 가장 악한 자들인데 하나님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 정말 이렇게 하는 것이 공의이고 정의이고 옳습니까? 17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하나님께 과연 지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옳습니까? 따져 묻습니다. 기도하는 자가 가지는 두 번째 갈등과 고민입니다. 응답은 받았는데 응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2장과 3장에 가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결국은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나는 이것이 싫은데 하나님은 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손을 펴서 가난하고 병든 자에게 나누기 싫은데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손해를 보기 싫은데 하나님은 손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부자청년이 주님께 나와서 기도제목을 가지고 물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될까요?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탐심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청년은 근심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응답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다르게 들어올 때 그때 어떻게 반응해야 됩니까? 그때 우리가 생각해야 될 유일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순종입니다. 내 생각은 짧고 하나님은 온 세상 전부를 통치하고 계시는 분이시니 나보다 나은 하나님이, 또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망하게 하지 않을 것 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지금은 이해되지 않으나 순종해보겠습니다. 주님 저는 동의할 수 없으나 그러나 순종하겠습니다. 훗날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리라 믿습니다.
인격적으로 깊이 신뢰하는 것이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이 믿음을 갖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시키고 계십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하박국이 대화하는 단계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대화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주고 받는 대화가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대등한 인격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입니다.
특권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특권을 특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두 가지 기도의 딜레마,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와 똑같은 기도의 응답에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선지자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딜레마를 통해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더욱 성장시키고 계심을 믿고 더욱 기도에 정진하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1) 기도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기도자가 되지 말게 하소서.
2)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큰 기쁨과 특권으로 생각하는 지혜를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