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 없이 살 수 없네 (292장)
이사야 16장 “피난처”
모압은 롯의 큰 딸의 후손들이죠. 이스라엘과는 친척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16장은 15장에 이어서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2절입니다.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다니는 새 같고 보금자리에서 흩어진 새 새끼 같을 것이라” 모압의 피난민들은 아르논 강어귀에서 매우 큰 혼잡을 빚고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너 피난가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모압 사람들의 처절한 외침이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너는 방도를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대낮에 밤 같이 그늘을 지으며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도망한 자들은 발각되게 하지 말며”. 이 말을 좀 풀어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그들이 유다 백성에게 애원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할지 말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여 주십시오. 뜨거운 대낮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처럼, 우리가 그대의 그늘에서 쉴 수 있도록 보호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피난민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곳에 우리를 숨겨 주십시오.” 근동지방은 햇볕이 매섭습니다. 그냥 있어도 힘든 곳에서 피난민의 신세로 강가에서 어찌할 수 없는 모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피난처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압백성들이 피난민이 되어 도망가고 있는데, 왜 유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까? 무슨 상관이 있다고요? 바로 여호와로부터 온 심판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여호와의 백성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하나의 아이러니가 형성되고 있지요.
내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살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한난을 주실 때 누구에게 피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설령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다 할지라도, 우리가 피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6절에서는 분위기가 바뀌어서, 그렇다면 왜 모압이 심판을 받았는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와있네요. 바로 ‘교만’입니다. 6절입니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도 헛되도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교만이란, 근본적으로 뻥이죠. 실력도 없으면서 잘난 체하는 것이 교만이죠. 이렇게 교만했던 결과가 너무도 비참합니다. 그들은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울음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 헤스본이여, 엘르알레여, 내 눈물로 너를 적시리니 너의 여름 실과, 제 농작물에 즐거운 소리가 그쳤음이라”
여기에서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이사야 선지자인지, 아니면 여호와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시각이 좀더 지배적이고, 설령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는 직분이기에 크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의 파멸을 보며 괴로워하고 슬퍼하십니다.
하나님은 참 역설적인 분이시죠. 공의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심과 동시에 심판 당하는 모압을 보면서 안따까움에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지요.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내 창자가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 하나님의 심적 고통이 얼마나 심하신지 그분의 마음이 울리는 수금과 같이 신음 소리를 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징계하실 때 이러한 괴로운 과정을 지나고 계십니다.
모압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노력할 겁니다. 12절입니다.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으리로다”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산당에 가서 호소해 보지만 문제가 해결될 리 없지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신들은 인간을 도와줄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습니다.
14절의 말씀처럼, “삼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그 남은 수가 심히 적어 보잘 것 없이 되리라 하시도다” 망한다는 소리지요.
전체적으로 보면 조금 슬픈 장입니다. 모압이라는 나라의 멸망과 피난민이 되어 비참하게 떠도는 내용이지요. 물론 16장 초반에서는 희망적이었습니다. 유다백성을 향해 도와달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합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16장 전체를 볼 때 모압이 하나님을 심오하게 이해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삶에 큰 어려움을 맞습니다. 어디에 기댈 곳도 없고 하소연할 곳도 없이 힘들어서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 좋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교회 안에서 마음도 안정되고 삶의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고 칩시다. 교회를 찾은 사람 입장에서는 처음 교회에 온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게 전부일까요? 아니요. 우리의 상황은 언제나 바뀝니다.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16장 5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 인자함으로 왕위가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정의를 구하며 공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참된 희망과 안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만 맛볼수 있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뜻이 우리 삶에 성취되는 것에 희망을 두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기도제목
1.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복음축제를 위해서
2. 우리교회가 더 나은 교회, 칭찬받는 교회로 발돋움하도록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