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예수 우리 왕이여 (38장)
이사야 6장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 6장은 이사야의 소명장입니다. 아주 유명한 구절들도 많고 찬양의 가사로 불리는 구절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영화롭게 선포하며 노래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아가겠다고 호기롭게 다짐하는 이사야의 모습을 상상하신다면,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적잖이 당황하실 겁니다. 본문에는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세 가지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라는 주제입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던 해인 742년에 소명을 받습니다. 그는 이상 중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봅니다. 1-4절에서 묘사가 되어 있는데요. 상상하기 힘든 모습입니다. 1절에서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이 얼마나 큰지 겉옷의 옷자락만으로도 성소의 공간이 가득 찼습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깨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을 지성소에 계신 분으로 국한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모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으십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스랍들의 모습도 상당히 신비롭습니다. 2절에 보면 스랍들에게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거리고,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굴과 발을 가린다는 것은 왕을 대하는 신하의 태도입니다. 이러한 스랍들이 외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찬양의 가사로도 자주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시고 그 영광이 충만한지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어서 이사야 6장의 두 번째 주제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이라면, 두 번째 주제는 인간의 죄악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한 이사야가 행복해 했을까요?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대한 이사야의 반응은 두려움과 죄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인간의 첫 번째 행동은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신적 능력을 경험한 베드로의 고백은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가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비추어 봅니다. 이사야가 5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는 자신만 부정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거하는 곳의 사람들도 동일하게 부정하다고 말합니다. 절대기준이 사라지면 상대기준 만이 남습니다. 남들보다 내가 조금 더 나은 것 같으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지요. 그리고 나는 올바르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의 연약함을 늘 바라보고 그분의 긍휼하심을 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여전히 더럽고 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고 받아주십니다. 6-7절입니다. “그 때에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어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대한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 스랍이 숯을 가져와서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성전 안쪽에는 금으로 입힌 분향단이라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 위에서 일정한 향품을 제물로 불사른 곳입니다. 거기에서 숯을 끄집어내어 이사야의 입술에 대는 상징적인 행동을 통해 이사야의 허물이 불타 없어졌지요.
그리고는 그 유명한 이사야의 소명이 나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여타의 소명에 비해 아주 멋져 보입니다. 모세는 소명을 받았을 때 나는 말을 잘 할 줄 모른다고 회피했었지요. 예레미야 역시나 소명을 받았을 때 나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한다고 회피했지요. 이에 비해 이사야의 외침은 상당히 호기 있고 적극적입니다. 마치 자원입대하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8절입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에서 ‘우리’라는 표현이 나온 것은 학자마다 견해가 다른데요. 삼위일체를 표현한 말이다라는 학자도 있고요 천상회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주님께서 누구를 보내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 때 이사야가 말하죠.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의 이런 호기 있는 외침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연히 우리를 보내시면서, 너희는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의 사랑을 전파하라. 이렇게 말씀하실 거라 생각하죠. 예, 맞습니다. 많은 경우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이사야에게 하신 말씀은 너무도 당황스럽습니다. 10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라.” 쉽게 말해서, 이 백성이 듣지도 않고 보지도 않고 있는데, 여전히 그 상태로 있게 해라. 그래서 완전히 망하게 해라. 이것이 이사야가 받은 소명입니다.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사야의 소명장에서 하나님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치유할 유일한 희망은 완전한 멸망 밖에는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실낱같은 희망이 생깁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만약 이 백성을 현재 상태로 놔둔다면 희망이 없었습니다. 이미 종교는 반이교도화 되었고, 계속 방치한다면 이교도화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모든 계시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그렇게 되도록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무서우리 만치 혹독한 정화 작업을 단행하십니다. 하지만 완전한 파괴가 목적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 목적입니다. 13절 마지막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절망의 끝에서 작은 씨앗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기 힘든 방향으로 몰고 가십니다. 때로는 마치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것 같은 방향으로도 몰고 가십니다. 도무지 기대할 것이 없고 의지할 것이 없는 절망의 상태로 내몰리기도 합니다. 이미 몇 번 겪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그 시기를 통해서 우리의 인격이, 우리의 믿음이 더 견고해지고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하루 살아가시면서 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행여나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심어놓으신 희망과 시작을 발견하는 우리 되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제목
1. 의료단기선교팀의 안전을 위해
2. 교육훈련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