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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내 맘의 주여 소망 되소서 (484)

시편 133그리움을 담아내는 공동체

 

세절로 구성된 이 시는 내용상 2개의 연으로 구분이 됩니다. 133편은 성전 순례시 가운데 열네번째 시인데 저자를 다윗으로 보고 있습니다.

 

1. 1: 여호와를 송축하라(1-2)

본문을 직역하면 보라! 어찌 그리 선하고 또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여기서 아름다운고는 원문상 즐거운, 유쾌한 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입니다. 이는 형제가 연합한 모습이 아름답다는 의미보다는, 형제가 연합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이 즐겁고 행복하다는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킹제임스 성경을 보니 (Behold, how good and how pleasant) 보라! 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행복한지라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번역 역시 이다지도 좋을까, 이다지도 즐거울까라 번역하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는 본시의 저자라 알려진 다윗은, 역사상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 사이 중간 지대에 있는 시온에 도읍을 정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으로 언약궤를 안치함으로 남북을 하나로 연합시키기 위해 그러하였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이유로 다윗은 누구보다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을 즐거워하고 소망하였습니다. 당연히 구속사적 관점으로는, 다윗이 언약궤를 에브라임과 유다 지파 사이에 안치하였음은, 언약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가 한 형제와 자매로 온전히 하나 될 것을 예표한 행위이기도 하지요. 또한 다윗의 삶을 보십시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의 아들인 요나단과도 깊은 사랑과 우정을 나눈 경험이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다윗이 원하고 바라고자 하였던 연합함이란 무엇일까요?

 

보통 연합이라 하였을 때 하나 되는 것이라고 여겨 서로에게 잘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연합함의 출발은 아닌 것 같습니다. 때론 사람들의 호의와 관심이 상대에게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지기에 그렇습니다. 보통 이렇게 말씀드리면 당연히 머릿속에서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연합함을 이루며 살 수 있느냐? 라는 질문이 들겠지요.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듯싶습니다.

보통 우리는 나는 기독교인이야. 나는 집사야. 나는 장로야. 나는 목사야. 나는 무엇으로 몸된 교회를 섬겨. 내게 주신 시간과 내 육체로 주님 위해 살아야지.’라며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속에는 여전히 내 시간과 내 몸을 내가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의도 하지 않았다 주장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좋아 보이는 인생으로 하나님께 자랑하려 하는 자신의 죄악 된 발로라 생각됩니다. 사랑과 연합도 이와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딜 가보면요. 우리 공동체는 사랑이 가득하다 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다들 좋은 사람이라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 가면 왠지 모르게 불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약 그곳에서 어울리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어딜 가도 적응 할 수 없는 공동체 부적응자로 도리어 낙인을 찍어버리기에 그렇습니다.

 

고린도전서 1312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안다 하지만은 많이 알아봤자 부분적으로 조금 알 뿐입니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주님을 뵈올 그 때에는 아마 주님 옆구리에 난 창자국과 못자국난 손을 만지며. ‘맞지~ 내가 이 주님 때문에 지금껏 살았지. 주님 아니었으면 나도 없었지.’ 하며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댈 때 즐거워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할 것입니다. 지금은 당연히 희미하지요. 하지만 성도는 여기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날을 기대하는 겁니다. 그리워하는 겁니다. 날 위해 죽으신 그 예수가 보고 싶은 겁니다. 사랑과 연합함의 출발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연합함을 자신의 소유로 삼아버리려 하면 안 됩니다.

 

주안에 진정한 연합함과 사랑은요. 내 열심과 노력으로는 아니 됩니다. 오직 십자가의 피로 더러웠던 내 옷을 희게 하시고 도저히 남을 사랑할 수 없는 나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자리로 몰아가시는 거에요. 그렇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실패해보고, 또 넘어져보면서 그럼에도 나를 용납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점점 커지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서 일하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주님이 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 공동체를 허락하신 그 분의 뜻을 알기에 그 자리를 피하질 않는 겁니다. 이에 나를 용납하고 진실하게 대하는 그 공동체가 그리운 겁니다.

 

그래서 시인도 2절에서 머리와 제 1대 대제사장인 아론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할 수 있음은,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아닌 우리의 대제사장이시오,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로부터만 흘러 말미암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과 사람을 소유가 아닌 그리움으로 대하시어 관계와 하는 일 모두 즐겁고 행복한 복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의 노력과 열심이 아닌 머리 되시는 예수님 먼저 바라보게 하옵소서.

2.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내는 그런 공동체, 가족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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