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 음성 외에는 (446장)
시편 132편 “나의 마음이 있는 곳”
시편 132편은 사무엘하 6장과 7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 언약궤 혹은 법궤라고도 불리지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는 장면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다윗의 왕조가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하신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언약궤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즉 신약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디에서나 하나님께 예배드립니다.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히 임하시는 거룩한 곳, 거룩한 장소는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휘장을 찢으셨지요. 가장 거룩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성소의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구별된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보다 거룩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제사장만이 갈 수 있는 거룩한 장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습니까? 언약궤 혹은 법궤로 불리는 하나님의 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한다는 것은 단순한 물건의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고자 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공동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법궤를 옮긴다는 것은 기쁘지만 두렵고 엄숙한 의식이었습니다.
1절부터 5절까지는 다윗의 거룩한 슬픔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다윗이 슬픈 이유는 성막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기적으로는 다윗이 결코 슬퍼할 수 없는 시기입니다. 다윗은 비로소 이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미 자신을 괴롭히던 사울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도 다윗에게 대항했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을 포함하여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세력들도 모두 물리쳤습니다. 이제 비로소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이룬 직후가 가장 기쁩니다. 예를 들어, 원하는 대학에 합격을 했습니다. 언제가 가장 기쁠까요? 합격한 직후가 가장 기쁩니다. 다니다보면 수업 따라가고 과제하다보면 기쁨이 줄어들지요. 원하는 직장에 지원해서 합격을 했습니다. 언제가 가장 기쁠까요? 당연히 합격한 직후가 가장 기쁩니다. 아무리 좋은 회사도 다니다보면 실망합니다. 다윗에게는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비로소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당당하게 섰습니다. 가장 기쁠 수밖에 없는 그 때에 고백합니다.
3-4절입니다.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이제 발 뻗고 편안히 잘 수 있는 이시기에 편안히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입니다.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다 있는데 딱 하나 빠진 게 있습니다. 성막, 즉 법궤가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도 이와 같이 원합니다. 다 가졌습니다. 심지어 왕이라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다 있어도 하나님의 임재, 즉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을 반대로 설명해 볼까요?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어디에서나 평안히 발 뻗고 잘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여러 시편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수많은 대적들이 나를 둘러싸도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평안을 누리는 시인의 고백을 많이 읽어 왔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6절과 7절을 보니 마침내 엘리 제사장 때에 잃어버린 법궤를 찾았습니다. 다윗은 법궤에 대한 소식을 듣고 감격하면서 성가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예배 의식 가운데 법궤를 운반하기 시작했습니다. 8-10절의 말씀은 주님의 동행하심을 기원하는 기도의 내용입니다.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평안한 곳은 바로 쉼터라는 뜻이지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해 주는 시온 산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법궤는 이곳저곳을 유리방황하며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궤를 안전하고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이 부분은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말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을 가리킵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시고’ 그의 후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왕으로서 후대 왕들을 위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부강한 군사력! 유능한 참모들! 견고한 성벽들! 이런 것들이 후대 왕들을 지켜 줄 거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과거에 가난하게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후손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하시던 말씀이 있어요. 내가 너희들에게 물려줄 것은 믿음의 유산밖에 없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좋은 말이지요. 그런데 물려줄 것이 좀 더 있으면 이거저거 물려주고 믿음도 같이 물려주마.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아니겠죠. 가진 것이 있건 없던 우리가 물려 줄 것은 믿음의 유산 밖에 없습니다. 지금 왕으로서 하나님께 사정합니다. 저를 보아서라도 우리 후손 왕들을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결국 우리가 자녀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11절부터 마지막 절은 18절까지는 다윗 언약에 대해서 노래합니다. 언약은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은 조건적입니다. 조건적이라는 말은 만약 한 쪽이라도 그 약속을 파기한다면 그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누구와 비밀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이 다른 누군가에게 비밀이야기를 하고 다닌다면 그 약속은 이미 파기가 된 것이죠. 그런데 언약은 무조건적입니다. 한쪽이 파기한다 할지라도 다른 한쪽에서 신실하게 모든 것을 지켜나갑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렇습니다. 먼저는 다윗 왕조에 대한 언약을 맺으십니다. 11절과 12절을 통해서 다윗 왕의 후손이 계속해서 왕위를 이어 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12절 말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좀 더 넓어집니다. 13절에서 16절을 통해서 이제는 시온에 대해서 약속하십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장소, 특별한 물건을 통해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임재를 드러내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시온을 택하십니다. 13절부터 14절 상반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그리고 시온을 복주십니다. 16절에 보면 그 땅에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하고 빈민들도 먹이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메마른 땅입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한 곳이지요. 그래서 늘 기근이 있습니다. 더구나 시온 산, 다윗 성이라고도 불리고 이곳은 원래 여부스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군사적인 요새입니다. 높이 솟아있어서 방어하기에 좋은 곳이지만 농사가 잘 되는 풍요로운 곳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 빈민조차도 만족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했던 사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은 복된 땅으로 변해갑니다.
그런데 제 설교 가운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영원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온 산에 영원히 거하시면서 주린 자가 없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지금 시온 산에 가봐도 별거 없습니다. 도대체 이 언약은 어떻게 된 걸까요? 17절과 18절에서 미래적인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 보니까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마치 선지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죠? 뿔이란 것은 군사적인 승리를 뜻합니다. 뿔은 동물 세계에서 가져온 이미지로서 강력한 힘을 강력하며 탁월한 인물을 가리킵니다. 메시아적인 칭호입니다. 등을 예비한다는 말은 왕조의 지속성에 대한 은유입니다. 장막 안에 등불이 계속 켜 있다는 것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의 집에 등불이 켜져 있다는 것은 그의 왕조가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의 통치로 한정 짓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더 위대하고 영원한 통치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고 누리고 찬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법궤, 즉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했던 작지만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시편 132편 전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했던 안타까운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법궤를 옮기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런데 하님께서는 그 작은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 가문을 복주시고 시온 땅을 거룩하시고 더 나아가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약속으로 놀랍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작지만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애끓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우리의 가족을, 나섬공동체를 이끌어 주십니다.
1 유년부 캠프가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진행되기 원합니다.
2 새가족환영회를 통해서 새로운 가족들이 우리 교회에 잘 정착하고 신앙의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