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느헤미야 4장
찬양: 세상의 유혹 시험이, 주가 일하시네
성벽의 무너짐은 두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는, 바로 일상의 삶의 무너짐, 일상이 하나님께서 주신 예배의 자리임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즉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불평과 불만으로 그들은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즉 신앙의 사유화, 창조의 본질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가 공동체로서 존재해야 함에도, 이러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신앙을 사유화 해버리게 된 것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져 버린 것이지요.
그들이 성벽을 다시 세워나간 것은, 바로 개인의 삶에서 무너져 버린 일상의 예배의 회복과, 하나님의 영광인 교회 공동체의 회복을 이루어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스룹바벨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집”의 완성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렇게 그 회복을 위해 그들이 일어나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오늘 바로 4장의 일입니다. 그들을 방해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산발랏” 과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하면, 이미 그곳에서 정착했던 사람들, 성벽을 세우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예배와 공동체를 회복함하고자 할때에, 오늘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와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우리가 다시한번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으로서 회복하고자 할때, 그것을 싫어하고, 분노하는 세력이 있는데, 그들을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이권을 잃을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성을 방해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 이면의, 사단의 세력, “하나님의 대적의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적 전쟁을 싸움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적이 우리를 어떻게 공격하려고 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의 분별하고 그들을 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격은 굉장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입니다.
1절에 보면..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비웃습니다.
1절부터 4절까지 보십시요. 그들이 어떻게 그들을 비웃고 조롱하는지..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너희가 무슨 실력이 있어서.. 성벽을 짓겠다고, 너희가 지으면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다. 쥐뿔도 가진것이 없으면서…
우리가 하나님앞에 다시한번 마음의 결단을 하고 회복을 소망하며 일어서고자 할때,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를 넘어뜨리려하는 사단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단이 우리가운데 영적 공격에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공격하는 무기는, 그것은 바로 “말”입니다. “말”로 우리를 넘어뜨리려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말하지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욥이 고난 중에 있을때에, 사단은 무엇을 통해 그를 공격하지요? 바로 가장 가까운 사람, 그의 아내와 친구들의 “말”을 통해 그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남편의, 아내의, 아이들의, 혹은 직장 상사가 되든 누구든… 무심코 던져지는 한마디의 말에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10절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짐을 나르는 힘이 다 빠졌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함이라”
사단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6절의 말씀처럼 결국 이 것이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그들의 회복이 그들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단은 산발랏을 통해서 그들을 말했고, 그 말을 듣자, 그들은 마음에 회의감과 불안함이 밀려온 것입니다. “그래 마저 저들이 이야기 한 것처럼 나같은 것이 과연 할 수 있을까? 결국 다시 실패할꺼야..”
“사단아 물러가라” 베드로가 사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말씀하신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생각속에 들어가, 그로 말하게 하여 예수님을 조정하려고 하는 그 실체를 보신 것입니다. 사단은 때로는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말”을 통해서도 우리를 넘어뜨리려 하는 그 사단의 전략을 우리는 분명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의 공격은 이만이 아니었습니다. 11절을 보면.. “너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너희를 죽일것이다. 그러니 빨리 우리에게로 도망오라”
데살로니가후서 2장9-10절의 말씀처럼 “악한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에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욥이 질병으로, 사단이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은 것처럼, 우리에게 질병과 물질적 손해와 같은 실제적인 공격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 어려운 것은 바로 12절.. 유다 사람들, 그 내부의 사람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성벽을 지어봤자. 이것이 우리를 구해주겠니?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해. 차라리 우리편에 서라. 그것이 너에게 더 큰영광을 얻게 해 줄꺼야..” 만약 성벽 그 자체가 목적이요, 그 성취가 목적이었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실제적인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교묘하기 어느순간 기회를 가장하여서 그를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에스라부터 느헤미야서까지 "하나님의 집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 주제일때에..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한 한가지를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바로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있다는 것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영적 전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마른뼈가 살아나.. “군대”가 됩니다. 군대는 무엇을 위해? 전쟁을 위해
에베소서.. 우리의 영광을 말하고 나서 “전신갑주를 입으라”라고 말합니다. 왜 갑옷을 입습니까? 번영신학자들처럼 예수 믿는것이 마치 유랑선에 올라.. 노래나 부르고 춤추는 삶이라면.. 왜 갑옷을 입습니까? 입을 필요가 없지요.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영광과 은혜를 받은 우리의 삶의 결론은.. 그러니깐. 그 복을 누리기 위해 전신갑주를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전쟁을 구지 모르고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지금껏 모르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과연 그럴까요?
영적 전쟁이 싫어서 홍해를 건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홍해를 건너지 않으면, 그들의 삶은 무엇입니까? 바로의 노예,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전쟁가운데 상처를 입고 고난이 있어도. 홍해를 건너는 것이 낫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것,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을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전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땅에서 아무 걱정없이 유랑선에서 유랑을 즐기듯 그렇게 사는 삶이 아니라, 그들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경험해 가는 삶,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을 사랑하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셨던 삶인 것입니다. 밤낮 우리를 참소하는 마귀와 싸워가며 그 영적 전쟁속에서 전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 승리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4-5절.. 바로 우리의 무기는 “기도”입니다.
그 방해앞에서 느헤먀이는 무엇을 하나요?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드러냅니다. 기도할때,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세력도 이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이 영적전쟁이 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순간 이 영적 전쟁속에 있는 우리가 해야할 것.. 바로 기도입니다.
두번째는 바로 14절 그가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을 향해 이야기 합니다. “지극히 크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자” 기억하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자카르”입니다. 이 자카르가 현재진행형 형태로 쓰였고, 이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행위임을 보여줍니다.
묵상의 여정이라는 책에서 한대목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신앙은 몸으로 한다” 우리의 신앙은 머리로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만큼… 나의 의지가 신앙을 배반하고, 내 감정이 나를 속일 때, 깊은 아픔과 우울과 절망의 골자기를 지날때, 나를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은 의지와 감정이 아니라, 몸의 기억일대가 많다. 구태의연하다, 율법적이다 라고 말했던 그 반복적인 몸의 활동이 내 의식을 변화시키고, 내 감정을 변화시키고, 내 의지를 다시 불러일으켜준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의 근육이 되고, 몸으로 기억하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 근육은 한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분을 묵상하고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오나”
다윗의 실력은 결국 “매일 주님을 바라봄”에 있었습니다.
힘의 법칙이 잠시 이기는 것 같아도, 결국 중력의 법칙이 힘의 법칙을 이깁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결국 이기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세번째는 14절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합니까? 함께 싸웁니다. 오늘 우리의 싸움은 나만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함께 싸워야만 이길 수 있는 싸움입니다.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요. 그런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서로를 의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의지하면서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20절 “너희는 어디서든지 나팔소리를 듣거든 그리로 모여서 우리에게로 나아오라,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사자깥이 부르짖어야 합니다.
13절.. 낮고 넓은 곳에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 있게 합니다. 그곳은 적들이 공격하기 쉬운 곳, 우리의 약점.. 그곳에 군사를 배치합니다.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아는 사단이 우리를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공격할 것입니다. 그곳에 칼과 창과 활을 갖고 서야 합니다.
그것은 깨어 기도해야 한다. 크고 두려우신 주를 바라보자. 묵상하자. 매일 매일.. 그것이 우리의 몸이 될때까지.. 그리고 우리가 함께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이 영적인 싸움을 승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제목
1. 오늘 우리의 삶은 영적인 전쟁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쟁터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속에서 영적 전쟁을 수행해 가는 군대여야 합니다. 주여 우리의 삶이 영적전쟁임을 기억하고, 깨어 기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는 사단이 우리를 공격할 것인데, 말로, 실제적인 어려움으로 공격할때에.. 함께 일어서서 주님을 바라보며 이 영적 싸움을 싸우고 승리하게 하소서.
2. 사단은 우리의 죄 가운데 틈타 이 기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또한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합시다. 많은 확진자들이 싱가폴의 근로자들가운데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의 회복과, 실제적인 코로나의 위협속에 싸우는 많은 의료진들을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이로인해 어려움을 겪는 성도님들이 많습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