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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 오 놀라운 구세주(찬송가 391장)

말씀 : 사사기 18:1~31


오늘 읽은 말씀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서 미가의 이야기와 단지파 사이에 일어난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미가는 어제 묵상하셨던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사람인데, 상당히 부유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레위인 청년을 자신의 제사장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그의 부와 지위가 계속 좋아지고 있었음을 추론할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미가와 단지파 사이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입니다. 각 사건을 보면 단지파 사람들이 거주할 땅을 찾다가 미가의 제사장 청년을 만나고, 그 청년의 말대로 좋은 땅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 땅을 차지한 이야기, 그리고 이 청년을 단지파의 제사장으로 삼아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언뜻보면 아주 성경적으로 보이는 이야기죠. 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조금 깊이 묵상하시면 성경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타락한 단지파의 모습이 발견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후로 단지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게 됩니다. 역대기에도 단 지파에 속한 인물이 한명도 거론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요한계시록 7장을 보시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인침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곳에 단지파가 빠져 있습니다. 즉 요한계시록을 결론으로 본다면 단지파가 이스라엘의 족보에서 사라졌다고 볼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단지파의 이야기는 단순한 실수, 잘못된 선택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게다가 바로 앞 사사 삼손이 단지파의 사사임을 감안하고, 실제로 그의 사사로서의 임무는 성공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 있기에 더욱 이 단지파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언가 애타는 마음으로 어떤 사실을 알려주려고 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이 단지파를 타락하게 했으며, 영적으로 육적으로 이스라엘의 족보상에서 사라져 버리게 하였을까요?

그 시작이자 근거가 바로 1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단 지파는 그 때에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지파중에서 그 때까지 기업을 분배 받지 못하였음이라.”

분명 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지파는 그 왕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했기에 이미 여호수아로 부터 분할받은 그 기업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사기 1장 34절을 보시면 아모리 족속들이 단자손을 산지로 몰아넣았다고 말합니다. 단자손들보다 아모리 족속의 힘이 더 강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이것은 문제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더 강한 족속도 분명 쉽게 이긴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들보다 강한 족속을 어떻게 이겼습니까?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1장 34절의 기록은 단순히 아모리족속이 강하고 단지파가 약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강해보이는 아모리족속을 핑계삼아 단지파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을 그대로 오늘 말씀까지 가지고 오면, 단지파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새땅을 찾고 있는 중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단지파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그들의 파워를 신상으로 치환해버립니다. 2절에서 단지파는 5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모세와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탐하는 그 모습이 옅보입니다. 4절과 5절을 보시면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합니까? 자신들을 위해 하나님께 물어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의 말대로 살기에 적합한 땅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땅을 차지합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27절은 그 백성을 칼날로치고 성읍을 불살랐다고 말합니다. 분명 여호수아가 벌인 성전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단지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것은 비슷해보이는 신앙이 아닙니다. 절대적이고 온전한 믿음을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보이는 신앙, 비슷해보이는 신앙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파가 하나님의 역사에서 사라지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단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신앙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빼고 보시면 단지파의 불신앙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9절과 10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그 땅을 본즉 매우 좋더라 너희는 가만히 있느냐 나아가서 그 땅 얻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 너희가 가면 평화로운 백성을 만날 것이요 그 땅은 넓고 그 곳에는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으니라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는지라.”

좋은 땅이라 평하는 이유가 일단 정복하기 쉽다는 것이죠. 그러니 속히 가서 정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중요한 한마디를 내밷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다”

이 문장을 보면 분명 이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고, 하나님께 뜻을 구한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시면 단지파가 말하는 하나님은 여호와라고 부르지 않고, 엘로힘이라고 부르고 있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엘로힘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으로 번역하지만 그 원래의 뜻은 뛰어난 신들 이라는 개념으로 최상급의 신을 지칭할때 사용합니다. 최고의 신을 의미하기에 우리는 쉽게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겁니다. 문제는 지금 단지파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에게 있어 최상의 신이 누구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신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는 신의 실체가 미가와의 사건에서 명확해집니다. 17절과 1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가를 부유하게 했다고 믿었던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심과 부어만든 신상이 바로 그들이 믿고자 한 엘로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단을 차지하러 가기전에 미가의 집에 들러 이러한 신상과 그 신상을 신상답게 해석해줄 제사장을 데리러 갔던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미 단지파는 하나님을 버렸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속에서 살아가니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겁니다. 그래서 행동으로는 믿음의 선조들과 같은 행동들을 하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믿는 것은 자신들만을 유익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돋보이게 할 우상이었다는 말입니다. 

31절을 보시면 사사기 기자는 이런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은 실로였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법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실로로 모였습니다. 솔로몬왕이 성전을 건축하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단지파는 미가의 신상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스스로의 우상을 하나님으로 삼아 스스로 작은 나라를 이루어 살았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보이는데, 실제 그들은 이방족속의 삶을 살고, 그들의 모습을 완전히 따라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가 보여주는 불신앙의 끝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불신앙의 끝을 잊혀짐으로 서술하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신앙의 중심은 과연 어떠합니까? 새벽을 열어 기도하는 우리에게 최소한 겉은 너무나 멋있는 성도입니다. 한두꺼플 벗겨봐도 여전히 신실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더 깊은 곳, 나와 하나님만 아는 그곳은 어떠합니까? 그 곳에서 만나는 분이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모습을 한 다른 것들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이 주를 향하고, 그것때문에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이 바램을  이루어내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중심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모심으로 잊혀져가는 단지파가 아니라,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중심에서의 변화가 오늘 우리의 삶속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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