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2장
찬양: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그 길 따라
주님 오늘 이 아침에 다시한번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기억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여 이 은혜를 잊고, 이 세상을 좇아, 이 세상에 것에 매여 살아가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땅에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주여 그 은혜에 붙잡혀 살아갈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주여 많은 기도제목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족의 건강, 승진과 이직, 아이들의 진로등으로 주님 기도합니다. 주님 모든 것이 주님의 도움 없이는 우리는 할 수 없기에, 주여 우리의 삶의 구체적인 기도제목들을 내려놓고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삶을 주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인도하여주시옵소서. 그러나 무엇보다 주님 이 기도속에 우리가 더욱 더 의지하는 삶, 주님을 더욱 더 가까이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 무엇보다 주님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으로 충만히 채워지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상반기의 훈련도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상반기 세례식도 진행합니다. 주님 훈련의 끝이, 세례식이 우리의 신앙고백의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점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주여 주님의 제자로, 자녀로 이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세상속에 있으나 세상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이시간에도 주님의 긍휼하심과 은혜가 필요한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 전쟁의 고통은 그 곳에 있는 자들의 말할 수 없는 고통 뿐만 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특히 가난한 나라의 이들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주여 속히 전쟁을 멈추어 주시고, 주님 그들의 욕심과 탐욕에 심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공의로움이 그 욕망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죽게 한 그들의 탐욕을 심판하여주시고, 그들의 피 맺힌 기도에 신원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이 아침에, 주님만을 의지하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여주시옵소서. 주님만을 더욱 더 사랑합니다.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함께 묵상할 말씀은 마태복음 3장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 나시매”
헤롯은 유다지역을 다스리던 한마디로 지역의 왕, 분봉왕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없고, 로마가 지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그의 권력을 지키는 일에 탐욕적일 수 밖에 없었고, 로마의 평화를 위해 히브리인들의 잘 통제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도시와 궁전을 짓기를 좋아했는데, 이는 반대로 백성들의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잃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들을 위한 통치가 아닌 로마를 위한 통치를 하며 고단한 가운데 그런 소망이 없는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다. 그런데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셨는가,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정보만이 아니라, 그분이 태어난 그곳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으로서는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이러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왜 꼭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했을까? 예수님은 태어나심부터 십자가의 죽으시는 모든 삶이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는 삶이었습니다. 즉 성경의 예언때문에 그는 그곳에서 태어나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동방으로부터의 박사들, 흔히 우리가 동방박사라 부르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헬라어로 그들을 “마고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서 정치 종교에서 힘과 권세를 가진 고위 계급이었습니다. 단지 박사나 천문학자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은 별자리를 관찰하고 그것을 통해 나라의 미래를 예언하거나 왕에게 어떤 정치적인 조언을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속에 “박사와 마술”이 바로 이들과 같은 사람들인데.. 당시의 지혜자들이요, 종교지도자요, 권력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신명기 18장 10절을 보면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중에 용납하지 말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람들은 그들가운데서 용납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 즉 그들은 이방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구원자로 오신 이를 맨 먼저 알아본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는 것과, 그들이 오히려 메시야의 탄생을 알려주러 왔다는 이야기가 히브리인들에게는 어떤의미일까?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 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이방의 마술사들이 우연히 별을 보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이사야 60장 3절에, “이방 나라들이 너희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사60:3)라는 말씀처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시대가 어떠한 시대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신 것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성취인 예수의 탄생은 구원의 기쁜 소식이요. 또한 헤롯으로 상징되어지는 세상의 권력자들에 대한 상징적 심판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탄생은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소식이지만, 또한 누군가에게는 “심판”의 소식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오늘 “동방박사”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자신에게 이 아침에 이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은 나에게 좋은 소식인가?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릅니다. 동방이라는 말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서방의 로마에게 압제를 당하던 그들에게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먼 존재이겠지요. 아마 몇 달에 걸쳐서 여행을 했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 있는가?” 다시말하면 지금 그들은 유대인을 다스리던 “헤롯”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칭은 성경에서 단 한 번도 쓰여 지지 않았던 표현입니다. 오직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메시야를 가리키는 특별한 뜻으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방인인 동방에 사는 박사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별을 보고”이것이 그들이 점성술에 의하여 알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성경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방인들에게, 특별히 옳고 옳지 못한 것이 뒤섞인 세속학문으로 역사의 흐름과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쓰며 왕을 보좌하는 이들에게, 당시의 최고 지식인들에게 메시야 탄생에 대해서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메시야의 오심은 그들에게는 좋은소식 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도 그를 경배할 만큼 기쁜 소식이 오늘 3절을 봅시다. “헤롯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어떻게 됩니까? 기뻐합니까? 그들이 그렇게도 기다렸던 그 기쁜 소식에 그들이 축제를 벌입니까? 아니요... “소동한지라” “He was troubled” 헤롯에게는 이 소식이 매우 불쾌파고 불안하였다면 어쩌면 이해가 갑니다. 로마의 세력을 업고 유대를 통치하는 자리에 오늘 그에게 있어서는 유대인의 왕이 났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도전이고 위기이기 때문이지요. 정체성에 대해서 항상 의심을 받던 헤롯(유대인의 왕) 그에게 있어서는 메시야는 자기의 삶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존재. 예수가 없어야 하는 것.
그런데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헤롯이 “그 유대인이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묻기 위해 부를 정도로 성경에 대해서 박식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역시 “was troubled”그들도 역시 소동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도 헤롯과 가까이하며, 권력안에서 이득을 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적어도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야 조차도 그들의 권력과 그들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것으로서만 오셔야 하는, 그러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필요에 의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 오실 메시야도 자신의 삶의 풍요로움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복음과 메시야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상 이 땅에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싶은 마음도 그가 무엇을 하시고자 하는 것도 그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런 그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동방박사의 모습은 새로이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던 동방박사.. 오히려 그들은 박사와 마술사들과 같이 별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려고 하는, 미신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이 유대인의 왕을 찾아옵니다. 사실 그들이 찾아온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별을 보고 메시야의 탄생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빛을 보고 먼곳에서 찾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의 계획속에는 이미 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비는 신비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그는 메시야의 오심을 깨달았고, 그를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상식속에는 왕이라면 유대의 옛 수도 예루살렘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을 테지요. 히브리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그 상식조차도 모르는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그 메시야를 예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그들은 메시야 앞에 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메시야는 작은 어린이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작은 어린아이에게 왕에게 주는 “황금, 유황과 몰약”을 드립니다. 왕이신 예수님께 합당한 가치를 드린 것입니다. 예배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그의 손을 이끄시고 하나님을 “그리스도요 왕으로 고백하는 자리에 이끄시는 것” 바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에게 정말 기쁜 소식입니까? 아니면 나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안에서 좋은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까? 저는 적어도 우리중에 헤롯과 같은 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모습이 혹시 그 종교지도자들과 같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비하면 베들레헴은 변방에 지나지 않은 작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다윗의 고향이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장소였습니다. 바로 새로운 역사는 이렇게 세상의 눈에 보기에 화려한 곳, 멋있는곳이 아니라, 그것이 보기에는 초라해보일지언정... 늘 변방에서 시작됩니다. 예전에 있던 교회에 백석대 채영상 교수님을 모시고 특강을 들은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이…
“하나님의 역사는 변방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내수동교회 큰 기대 없다. 교만을 버려야 한다. 교회에 대한 자랑, 조금이라도 버려라. 하나님은 쓰레기들을 모아 일하신다. 겸손하고 낮아져야 한다. 우리가 변두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정신차려라. 서울에서 유명한교회들에 교만이 하늘을 찌른다. 하나님의 말씀에 깨지는 사람들이 적다. 변두리의 작은교회들을 가면 굶주려하고, 그러기에 깨지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변방에서 부르셨다. 스스로 변방에 있어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향해 굶주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 굶주린 자들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진심과 진정으로 그게 우리의 신앙입니다. 동방박사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왕이신 예수님을 만난 모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이요 섭리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안에 굶주림과 갈망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몇 달이 걸려도... 그 메시야를 만나겠다는 간절함... 그들이 예수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변하는가...
박사들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들이 어떻게 변하였는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길로 돌아갔습니다. 그 길은 그들이 돌아갈 수 있는 편하고 빠른 길이 아니라, 어렵고 먼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갑니다. 그들의 변화를 보십시오. 메시야를 찾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의 지혜와 경험, 상식을 따라 “예루살렘”에 왔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지금 그들은 세상과 자신의 경험의 말을 듣지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다른 길”을 택합니다. 예상치 못한 길이었고, 계획하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말이 아니라, 자기의 상식과 지혜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의 삶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세상에 종노릇 하지 않고 세상이 만들어놓은 프로그램속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길”로 나가합니다. 그길은 넓고 빠른 길이 아니라, 좁고 먼길일 수 있습니다. 아니 그럴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길을 걷고 있습니까? 헤롯처럼 예수가 필요없는 길 아니 있어서는 안되는 길, 또는 종교지도자들처럼, 나 중심적으로, 만약 내 인생에 도움이 된다면 그 안에서만 내게 필요한길? 아니면 오늘 동박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그길, 어떤 길입니까? 세상이 말하는 다른 길과는 다른 하나님의 길을 걷고자 하십니까? 그 길은 자기중심적인길, 성공과 부의 길이 아니라, 절제와 나눔, 돌봄과 섬김의 길이요, 다른이들을 위해 기꺼이 상처를 받는 길, 그 십자가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삶이 됩시다. 스스로 변방에 거하는 삶이 됩시다. 그것은 바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인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 내게 도움이 되는 한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손해가 될지언정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순종하고 따르는 삶, 그 길을 걷는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 내 생각과 지혜와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 오늘 하나님의 역사는 변방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오늘 주님의 뜻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힘과 권력을 키우는데 관심을 두지 않게 하시고, 사랑과 섬김으로 더 낮은 곳에서 기도로 진실함으로 섬기는 우리가, 교회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