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 주 없이 살 수 없네 (292장)
시편 123 "긍휼을 구하는 자"
이 시는 양적인면에서 매우 짧지만, 애가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시입니다. 1절로 2절에서는 여호와를 향하여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3절로 4절은 조소와 멸시 가운데서도 은혜를 구하는 시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후반부를 어두운 내용으로 마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반면 전반부인 1절로 2절 말씀은, 지금 눈 앞에 놓인 조소와 멸시들을 해결하시는 여호와를 시인은 바라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앞부분에 해결 방법을 둔 거에요. 그리고 뒷부분에는 지금의 현실을 둠으로 언 듯 비관적으로 마치는 듯 보이지만 실상 이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여호와께 문제를 맡기고자 하는 시인의 모습이 더 강조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여호와께 긍휼을 구하는 것이 지금 내 앞에 놓인 문제들을 궁극적으로 해결할 방법임을 알았던 겁니다. 나는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기에 종과 그 상전, 여종과 그 여주인의 표현을 빌어 시인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풀어내고 있는 겁니다.
1절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여기서 ‘계시다’라는 동사는 ‘거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다’의 의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인간의 인생들을 통치하고 계심을 시인이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장면인 겁니다. 내 인생도 결국은 당신 손에 달려 있기에, 4절 여전히 조소와 멸시당하는 나이지만 하늘 보좌에 거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눈을 들어 주께 향하겠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지금 보시는 성경에는 나오지는 않지만 원문을 찾아보시면 힌네! 보소서!로 시작 함으로 더욱 간절해지는 시인의 감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 절에서는 두 단어가 중요합니다. 바로 ‘눈’과 ‘손’입니다. 눈은 본래 사람의 눈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시인의 관심과 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손’은 사람의 손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손으로 보내는 표시로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주인은 노예에게 직접 말하기 보다는 손짓으로 모든 것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종은 늘 누구의 손을 주시해야만 했나요? 늘 주인의 손만을 주목해야만 했습니다. 쳐다봐야만 하였습니다.
시인은 이렇듯 자신의 시선이, 자신의 마음이,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고정된 것을 고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했던 두 가지 단어를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시인은 여종의 눈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 같이 자신의 시선이 하나님에게만 고정되어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인이 2절에서 시점을 바꾸어버립니다. 1절에는 분명 “내가 눈을 들어”로 1인칭의 관점으로 개인의 고백을 드렸다면, 2절에 와서는 “우리의 눈”으로 공동체로서의 믿음의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3절입니다. 후반부라 볼 수 있는 3절부터는, 심한 멸시와 조소가 넘치는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심한 멸시는 원문상 한 번의 깊은 멸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한 번 정도의 깊은 멸시라면 참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멸시였습니다. 이 말은 한 사람의 멸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 사람의 동시 다발적인 멸시와 조롱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나 3절 전체를 끌고 가고 있는 문장은 바로 은혜를 베푸소서!임을 잊지 마십시오. 무려 두 번에 걸쳐 여호와께 은혜를 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상태를 시인은 스스럼 없이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시인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구하다의 원래 단어는 ‘하난’이란 단어인데. 동등한 입장에서 보살펴 달라는 그런 정도의 간구가 아닙니다. 강한 자. 부요한 자, 윗 사람이~ 약한 자, 빈약한 자, 아랫사람을 향하여 혹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그 ‘하난’ 그 은혜를 시인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 구하고 있는 겁니다.
마치 신약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이 주님에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간청하며 자신을 개로 여긴 것처럼 시인 또한 자신을 약한 자. 빈약한 자. 은혜 받을 자격 없는 자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주님은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이 여인이 소문을 듣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을 위해 주님을 찾아온 겁니다. 왜냐하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어린 딸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과의 몇 마디 오고가는 대화 속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결국 자신을 개로 여기게 됩니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난 당신 앞에 그저 개일 뿐이라는 겁니다.
사람 간 보통 교제해보면 아시겠지만, 서로 간의 약점이나 수치는 가리고 싶어 하는 게 우리입니다. 좋은 모습만을 은연중에 보이려 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습관을 하나님간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유지해내려는 것이 문제인 겁니다.
아시다시피, 수로보니게 여인의 앞선 본문이 마가복음 7장 1절로 23절인데 본문 내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과 장로들의 전통이 나옵니다. 이에 주님께서 6절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7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8절.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그러나. 이 여인은 달랐습니다. 주인에 의해서만 살아가며 오직 주인의 손짓만을 쳐다보면서 늘 불쌍히 여김 받기를 원하는 개이길 원했습니다. 이 고백이 있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이 개임을 알고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 많아져야 하는 거에요. 그러할 때에 가정교회나 부서간의 교제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해지는 겁니다. 그러한 복된 모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절입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여기서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는 통상적으로 ‘목구멍’으로도 비유가 되기도 하니 넣어서 읽어보시면요. 시인의 심령이 어느 상태였는지 더 와 닿게 됩니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목구멍에까지 넘쳤나이다. 쉽게 말씀드리자면, 악인들의 조소와 멸시가 내 심령으로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까지 내 목구멍까지 차고 넘쳤다는 겁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시인의 삶은 마치 우리의 삶을 미리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러하기에 앞으로 저와 성도님도 살아가시면서 말도 안 되는 조소와 때론 슬픔을 만나더라도 우리는 시편 123편의 시인처럼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바래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시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즐겁게 살아가시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제목
1. 주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2.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 앞에 서게 하옵소서.
3. 앞으로 있을 유년부 캠프와 틴즈와 유스부 단기선교 위에 은혜를 부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