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창세기 9장 - 묵상과기도

by nasum posted Sep 1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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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주 음성 외에는(찬송가 446장)

말씀 : 창세기 9:1~29


오늘 함께 읽은 9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무지개를 상징으로 하는 새로운 언약을 깨닫게 해주시는 장면이 중심을 이루는 장입니다. 그러나 또 이러한 은혜의 사건이후에 함의 범죄라는 죄의 테마가 반복되는 장이기도 합니다.

홍수의 심판으로 죄악으로 치닫던 인류는 사라지고 당대의 의인인 노아로 말미암는 새로운 믿음의 세대가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하나님의 문화명령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무지개를 통해 보증하여 주심으로 견고하게 시작합니다. 그런데 왜 바로 이어서 함의 범죄가 등장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한 근거와 답을 알려주는 구절이 창세기 8장 21절과 22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계획이 악함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홍수이후로 이에 대한 저주와 심판을 거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대신에 우리와 동행하시며 기다리시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 땅이 있을 동안 즉 세상 끝날까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과 의지로 운행하시겠다는 것을 확인하여 주십니다.

9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지가 실제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확인되는 장면의 기록입니다. 1절과 7절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에덴에서의 문화명령을 앞뒤로 반복하시면서 인류의 역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의지안에 있는 것임을 확인시켜주고 계십니다. 여기에 에덴동산에서는 없던 조건 한가지가 추가됩니다. 생명이 되는 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각심과 생명을 살리려는 행동의 강조는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가 이제 얼마나 커지고 강해지는 가를 보여주는 표식이 되어집니다. 생명에 대한 마음을 통해 새시대의 삶을 허락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더해 다시는 우리를 물로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보증으로 무지개를 지정하십니다. 비온 뒤 나타나는 무지개를 볼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겠다는 의지로 믿어 의심치 말라는 것입니다.

함께 16절과 17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무지개를 통한 언약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만 유효한 언약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땅에 있는 모든 생물과의 언약입니다. 우리는 잊어도 땅의 생물이 기억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만큼 하나님의 이 약속은 완전하며, 변함없으며,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창세기 처음부터 보여주시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노아를 통해 새시작을 시작하실때 알려주고 계심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사실이 성경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18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을 약속받았는데, 곧 이어서 함의 연약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관점이 전 인류에서 한 사람, 한 가족, 한 민족으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8장 21절에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이 말이 실제 어떻게 나타나고 있으며, 어떻게 적용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의 삶에서 경험되는 수많은 차별과 분리와 나눔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의 결과라는 것 또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만 보더라도 당대에 의롭다는 평이 있었지만, 방주에서 나와 살아가며 점점 포도주에 의지한 삶을 살았습니다. 21절에서 말하는 포도주라는 단어에 정관사가 있기에 바로 그 포도주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이것은 노아가 포도주에 익숙하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점점 노아역시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노아의 연약함은 25절의 말씀에 잘 드러납니다. 사람을 통한 최초의 저주가 선포되는 절이 바로 25절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술에 깨어 자신의 치부가 공개된것에 대한 결과입니다. 신학적으로 함이아니라 함의 아들 가나안이 저주를 받기에 논란이 많은 구절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셈과 함과 야벳에게는 방주에서 나온후 복을 주셨기 때문에 노아가 함에게 직접 저주를 내리지 못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결국 이 저주가 후대에 이루어지기에 상징적인 의미로 함의 아들에게 저주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의인이었던 노아의 입에서 성경최초로 저주가 외쳐질정도로 노아역시 연약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함은 어떻습니까? 22절에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죄입니까? 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단어는 면밀하게 관찰했다, 만족스럽게 응시하였다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즉 함은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형제들과 공유합니다. 옅봄을 즐기고, 그러한 죄를 더 많은 이와 공모함으로 더 큰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죄된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성을 이길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선택하기 보다는 죄를 통해 즐거움을 누리고, 그 쾌락에 빠져 그 죄를 널리 확산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함이 저지르고 있는 죄의 모습이요, 악함의 모습인것입니다.

이렇듯 성경은 완전히 새로운 시작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죄로인해 물들어버리고 있는 노아와 함을 이야기 함으로 우리의 힘으로는 온전한 정결이 될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주의 언약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시복음으로 주어진 예수그리스도를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홍수후 노아의 삶에 대한 평가는 350년을 살았고 죽었다는 기록이 전부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기다리고 참으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그 인생에 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노아와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오늘을 점검해보길 바랍니다.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그리고 끝까지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을 우리의 삶속에서 무지개와 같이 선명하게 만남으로 주님의 언약을 마음에 새기는 승리의 하루를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