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레위기 24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Feb 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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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 슬픈 마음 있는 사람(찬송가 91장)

말씀 : 레위기 24:1~23


오늘 새벽에 우리가 묵상하는 레위기 24장의 말씀은 크게 2부분으로 나누워집니다. 1절에서 9절까지는 성막의 내부인 성소에 놓여 있는 두 기구에 대한 내용이고, 다른 한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한 혼혈아이에 대한 처분을 중심으로 하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2절에서 4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등불을 밤 시간동안에 계속해서 켜둘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5절에서 9절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하는 떡 열두개를 하나님 앞에 항상 진설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원토록 잘 관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성소의 구조상 떡은 등잔대의 정면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등잔불이 떡상의 떡을 항상 비추도록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을 볼때, 이것은 분명 빛의 상징인 하나님과 떡의 상징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함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 관계를 언약으로 설명합니다. 즉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맺은 언약이 영원함을 눈으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절, 8절, 9절에서 영원한 규례, 영원한 언약이라고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매일 매일 봄으로,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신경써서 관리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이스라엘이 살아갈수 있음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10절이하의 말씀을 읽으면 좀 이해가 어렵습니다. 갑작스럽게 한사람의 이야기로 집중하고 있는데다가 그 결과는 처참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구약의 엄격하고 무서운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말씀의 구조를 자세히 보시면 하나님이 이야기 하고 싶으신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여라, 받은대로 갚아주어라” 라는 것이 아님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를 죽이라는 것이라면, 14절로 끝내시면 됩니다. 율법대로 죽었기에 더 고민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말씀에서 끝내지 않고 계속 말씀을 이어갑니다. 17절,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죽는다 18절, 짐승을 죽인자는 짐승을 갚아주어야 한다. 19절 이웃을 다치게 하면 나도 다쳐야 한다.. 무슨말입니까? 우리의 행동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를 넘어서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했다면, 그것을 원상복구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분명 이 말씀들은 죽여라 물어주어라 상하게 해라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결과가 있으니, 사람의 생명을 해하지 말아라, 짐승을 함부러 죽이지 말아라, 남을 이유없이 해하지 말아라라는 말에 방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과는 확실하지만 그 결과로 우리를 겁박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라, 그 결과를 우리가 경험하지 않게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사실을 더 알려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울타리가 어디까지인가? 라는 사실입니다. 22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의 법은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그 백성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동일하게 유효하다는 이 말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법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다는 중요한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 불신자 같고, 우리의 생각에 교회에 다녀서는 안될것 같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 함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이 불신자를 나에게 붙여주셨을까요? 왜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통해 그들을 해석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음을 우리를 통해 알려주기 위해서라는 것도 생각해볼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살리심과 그에 따르는 책임에 방점이 있고, 그 법이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이 사실속에서 등잔불과 떡을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이 보일까요?

그것이 바로 슬로밋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독함으로 죽은 사건입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이 슬로밋의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타국인의 장막터는 순수 이스라엘 혈통을 가진 자들의 장막터와 약간 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아버지의 혈통을 따라야 하는 관례상 이 여인의 아들도 타국인의 장막터에 장막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좋은 곳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이 이들이 단지파의 지역에서 장막을 치려 했습니다. 어머니의 신분으로 보면 당연히 단지파에 들어갈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파 사람들에게 거부되었고, 결국 자신의 권리를 되찾고자 단지파의 어떤 사람과 격하게 싸우던중 하나님의 이름까지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 아들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아이러니 하게도 믿음이 과도하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달랐던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됨을 가치있게 여긴것이 아니라 자녀됨으로 얻는 권리만을 가치있게 여기고, 그 권리만을 요구한 것입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겉은 신앙인인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가져야할 거룩함, 정결함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매일 매일을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결과론적인 은혜와 복을 경험하는 것을 믿음의 최우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믿음의 시작이요, 전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를 매일 경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이 시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삶을 해석할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권리가 주는 욕심에 빠져 믿음의 본질이신 주님을 잊어버리는 미련함을 버리고, 믿음의 기초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새벽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