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8일] 시편 139편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un 08,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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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 마음속에 근심있는 사람 (365장)

시편 139 "시온의 은혜"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돈이론으로 처음의 미세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말하는 이론입니다. "북경에서의 나비의 날개짓이 뉴욕에 일어난 태풍의 원인이다" 라는 학자들의 풍자로 인해 나비효과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습니다. 작은 나비의 날개짓이 태풍을 만들정도로, 자주 작은 실수나 오차로 인해 결과는 완전히 달라질수 있다는 이 이론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겪는 사건이 아무리 커보여도 실제로는 지극히 작은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을 배경으로 2004년에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주인공이 현재의 잘못된일을 바로 잡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과거의 사건을 바꾸어 놓음으로 현재의 잘못을 바꾸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과거에 바꾸어 놓은 그 사건이 현재에 왔을때는 예상 밖의 상황을 전개해 놓습니다. 그래서 또 그 바뀐사건을 돌이키기 위해 또 다른 과거로 떠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택한 최종 목적지가 엄마의 자궁안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면, 지금 무언가를 바꾸는 것이 결국 완전한 답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이세상에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고, 주인공은 엄마의 자궁에서 스스로 탯줄을 감고 죽습니다. 이것이 이 영화의 내용인데요, 오늘 시편의 주인공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의 모습과 같아보입니다.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민하다가 결국 엄마의 자궁속의 자신에게까지 내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6절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시인은 힘들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시인에게 고난을 주고 고통을 묵인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시인의 아픔은 하나님의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다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이에게 고난을 주고 있고, 그 고난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것은 신의 저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고백입니다. 지금의 고난의 이유를 나는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아시겠지만, 나에게 말씀하여주지 않으니 나는 모르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인의 이 절망의 고백은 실제 그의 삶을 깊은 낙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이 절망으로 떨어지며 7절에서 12절까지의 말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피할데가 없네요, 나에게 저주를 주시는 주님을 피할데가 없네요. 이 고통을 주신 주님을 떠나야 고통이 끝날텐데 주님은 어디에게 계시니 결국 이 고통을 해결할 방법이 없네요.. 

한마디로 전지하시고 모든 상황을 초월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 같지만 실제 시인은 그러한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자신을 철처히 외면하고 계시며, 고난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계신 하나님을 향해 한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해결해주지 않으시기에 결국 모든 아픔의 근원을 스스로 없애려고 하는 중입니다. 완전한 낙담, 절망의 구렁텅이속에 시인이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시인의 기가막힌 마음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신다고 말입니다. 지옥에서라도 살아보려고 하나님을 피했는데 거기마져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이 표현은, 시인의 마음이 지옥보다도 더 악하고 더 참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이런 마음의 절망, 그 종착점이 어머니의 모태입니다. 시인은 앞선 나비효과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자신의 모태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 모든 것을 내 팽개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진짜 참 모습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모태에서말입니다. 절망의 끝자락에서 시인 다윗은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의 고백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모태에서 자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만들어져가는 것을 바라보며 죽어야지 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자신을 만들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렇게 인생의 시작부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지음을 받은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서서히 시인 다윗은 일어섭니다.  15절에서 말하는 은밀한데와 땅의 깊은 곳은 문맥상 어머니의 자궁을 뜻합니다. 즉 어머니의 자궁속에서 자라날때 사람들은 그가 아들인지 딸인지도 모르고 그져 기다릴뿐이었지만 주님은 다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의 시작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는 함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게되었을때 다윗은 17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생각이 나에게 보배롭다.. 여기서 보배롭다라는 말은 측량하지 못한다라는 뜻의 단어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주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말은 모르겠다는 말이아닙니다. 이어서 고백하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라는 다윗의 고백을 보면 그가 주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 것은 모르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은혜가 부어지고 있어서 어떤 특별한 한가지가 전부라고 말할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다윗은 자신의 모태에서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여기며 그 당시로 자신의 눈을 돌렸는데, 주님은 그때부터 다윗을 지으시고 함께하고 계셨으며 수많은 은혜를 부어주고 계셨음을 알게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지금의 삶을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중에 하나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9절 이하에 믿음의 선포를 하게 됩니다. 악인과 피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이 자신을 떠나갈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원수들이 사라질것을 선포합니다. 강하고 담대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 회복되었음을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확인해볼수 있습니다.

다윗이 철저한 낙망과 그 낙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오늘의 노래, 마치 엘리야가 떠올르시지 않으십니까? 최고의 승리이후에도 여전히 득세하는 이세벨이 무서워 하나님께 목숨을 가져가 달라고 애원하던 엘리야... 완전한 절망속에서 죽음만을 간구하던 엘리야...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에 만나주십니다. 먹여주시고 힘을주셔서 하나님께 나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오늘의 시인 다윗처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과 같습니다. 엘리야의 마음이 우리와 같습니다. 언제고 현실의 힘듦때문에 이러한 절망을 경험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실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지극한 사랑으로 만드셨고 키우셨고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다윗처럼, 그리고 엘리야처럼 이 사실로 인해 영적인 능력을 충전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승리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제목

1. 나를 모태에서 부터 만드시고 인도하신 주님이, 지금 이순간에도 함께 하고 계심을 깨닫고, 그 주님을 붙들게 하소서. 

2. 내일 바탐으로 떠나는 틴즈를 보호하시고,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오게 하소서

3. 가정교회 선교지 방문과 유츠, 청년부 단기선교가 잘 준비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