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시편 149편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Jun 22,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찬송가 :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찬351장)

149편 영적 전쟁터에서 외쳐지는 승리의 함성 


피카소의 걸작중에 황소머리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자전거의 안장과 의자를 단순하게 붙여서 거의 완벽한 황소의 머리를 만든 작품입니다. 자전거의 안장이나 손잡이는 전혀 다른 모양과 기능을 하는 것인데  둘이 하나로 어울러져서 완벽한 황소머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처럼 코드가 완전히 다른 두개의 개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예술적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피카소를 뛰어난 예술가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할때 피카소가 황소머리라는 작품을 만들때의 이미지가 생각납니다. 왜냐하면 오늘 시편에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가지 이미지가 등장하는데, 그 상반된 이미지가 모여서 하나의 완벽한 작품을 내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개의 이미지는 6절에서 아주 명확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고 다른 하나는 두날가진 '칼'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과 칼을 가지고 적들을 벌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다른 이미지 입니다. 평화의 시기와 전쟁의 시기처럼 같이 공존하기 어려운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은 이 두가지 이미지를 아주 천연덕스럽게 하나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서 수많은 신학자들은 이 두가지 이미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두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해석하기 어렵다입니다. 

궁켈이라는 신학자는 “매우 단순하지만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했고, 세레스코라는 신학자는 “이 시는 해석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브루거만이라는 신학자는 “나는 찬양으로서 이 시편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오늘의 본문은 파고들면 들수록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에 1618년 유럽에서 로마카톨릭과 개신교사이에 있었던 30년전쟁을 하는 동안 로마카톨릭에서는 제후들을 위한 전쟁 찬양으로 이 시편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반대로 독일의 종교개혁가 토마스 뮌쳐는 카톨릭을 향한 피의 복수를 시행할때 이 시편을 낭송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학자들이 이 시편을 해석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해석하면 내가 믿는 신념을 위해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본문으로 오늘의 시편이 낭송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황소머리를 만든 피카소가 사진작가 브라사이와의 대화에서 그가 어떻게 황소머리를 만들었는지 설명한 기록이 있는데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해석하기위한 기준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아십니까? 어느 날 나는 물건들이 뒤섞여 쌓여있는 곳에서 오래된 자전거 안장이 녹슨 핸들바 옆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순식간에 그것들이 내 머리 속에서 결합이 됐습니다.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황소머리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용접해서 그것을 붙이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동으로 된 물건이 놀라운 것은 전혀 다른 물건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고 마침내 그것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모를 정도가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위험하기도 합니다. 만약 황소머리만 보고 이것을 만든 자전거 안장과 핸들바를 보지 못한다면 이 조각은 그 효과를 어느 정도는 잃을 수도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새롭게 조합된 황소머리, 그것만 보는것은 온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래료인 안장과 핸들바도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종합된 해석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칼을 들고 적을 전멸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IS와 별반 다를것이 없는 종교가 됩니다. 또한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진리와 상충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의 종합이 아닌 각론을 보면 어떤 내용이 있을까요?


1절에서 4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승리를 재현하고 있는 노래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출애굽이라는 명시적인 표현은 없지만 출애굽과 연관되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2절에 '이스라엘을 지으셨다', 3절에 '춤추고 소고치며 찬양한다', 4절의 '자기백성' 이라는 표현들이 바로 출애굽의 이스라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1절의 '새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한다'는 표현은 바벨론에서의 두번째 출애굽을 바라보는 행동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인되시는 하나님때문에 가능한것이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회복시키는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모습을 통해 제2의 출애굽이 있을것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5절에서 9절은 가나안정복 사건에 근거하여 부르는 승리의 새노래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9절에 나와있는 열왕을 처형하는 모티브는 예전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을 정복할때 이방의 왕들과 귀족들을 처형한 사건을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고자 한 이들의 최후가 완전한 죽음임을 보여주는 것이 가나안정복사건입니다. 시인은 그러한 영적인 승리가 지금도 계속되어야 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두가지의 사건을 6절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자녀는 승리의 출애굽을 하는 사람이며, 그 출애굽의 과정에는 승리를 선포하는 영적인 전쟁이 있을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는 실제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시가 아니라 영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시로 해석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전쟁중이 아니라 예배중에 노래되어진 시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가나안정복의 사건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때문에 가진 위대한 승리를 보여주며, 하나님 밖에 있는 이들의 영원한 멸망도 보여줍니다. 시인은 바로 이 두가지의 이미지를 하나로 엮으면서 지금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광야의 이스라엘백성처럼 살지말고 여호수아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라고 겪려하는 것입니다.


시편과 성경의 세계관에서 보면, 선과 악, 진리와 거짓,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이말은 지금 우리도 영적인 전쟁터 한 복판에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과 불법이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하여 기도 하고 찬송하면서 진리로 싸워야하는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따라서 ‘입으로 찬송하며, 손에 칼을 들고 있는 시인의모습’은 이세상에서 ‘거룩한전쟁’을 하고 있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진리위에서서 삶속에서 영적인 승리자이신 주님과 함께함으로 승리의 함성을 외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영적인 승리를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진리와 생명이 진정한 소망임으로 알리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시편기자의 마지막고백처럼 오늘 시편의 영광이 우리모두에게 넘쳐흐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제목

1. 영적인 긴장감을 깨닫게 하시고, 또한 그러한 긴장속에서도 승리하신 주님때문에 승리자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2. 단기선교를 통해 뿌려진 복음이 잘 자라게 하여 주옵소서(바탐-이광수, 태국-박훈제, 말레이시아-박철현 선교사님을 위해)

3. 마음을 열고 기도할때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삶에 넘쳐흐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