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 마태복음7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May 0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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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마태복음 7장

찬양: 선을 행하면서, 겸손히 주를 섬길 때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를 주님의 곁으로 인도하여주시고, 주님앞에 기도하도록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보이는 것에 얽매여 살기 쉬운 우리인데, 주님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오늘 이땅에서부터 하나님의 주인 되심으로, 그 나라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우리로 주님의 은혜를 따라 진실하게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다른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삼지 않고 오직 주의 사랑으로 정체성을 삼아 근심과 염려의 삶이 아닌,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오늘 이시간에도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주여 주님께서 권력자들의 마음을 돌이켜 주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러한 세상의 혼란함과, 그속에 하나님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인생의 허무함을 우리로 깨닫게 하셔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게 하여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허무함과 염려속에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우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일에 있을 세례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만 살겠다는 그 마음의 고백, 그 진실한 고백이 되게 하여주시고, 그 고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대부분의 교육 훈련들이 마치거나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 훈련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머리로 이론으로만이 아닌, 가장 낮은 자리에서의 섬김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원합니다.


주님 오늘도 이 아침에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며, 우리가 가장 필요한 말씀을 주시옵소서. 우리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 하며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마태복음 7장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본문입니다. 사실 그만큼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본문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7-11절의 말씀을 읽으며, “간절함”에 초점을 둡니다.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 세번이나 비슷한 표현이 반복된 만큼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의 의미를 조금 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문맥속에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 예수님께서 산위에서 제자들을 앉혀놓고, “하나님나라, 이땅에 하나님의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이미 임한,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는 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 한마디로 “비판하지 말라” 사실 왜 갑자기 이 말씀이 등장하는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어제 6장을 함께 묵상하며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믿음이 현실이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근심과 염려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염려는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함으로 맺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씀속에서 오늘 “비판하지말라”라는 이 말씀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문맥속에서 오늘 말씀을 보면, 5절을 보십시요. “외식하여 자여”라고 말합니다. 외식한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바로 “연극배우”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티비를 보다가 한 배우가 밥을 먹으러 가서 어떤 할머니들에게 욕도 먹고, 한번은 뺨도 맞았다는 에피소드를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우가 드라마에서 엄청 얄밉고, 착한 주인공을 괴롭하는 그런 약역으로 나왔던 거에요.. 얼마나 연기를 잘했던지.. 바로 그 배우의 연기처럼,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바로 그들은 삶이 “연기 하는 것”과 같이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는 연기지요, 진짜 모습이 아닙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의 삶을 연기하듯이 살아갑니까? 왜 가식적이고 외식적으로 살아가나요? 자기의 진짜 모습을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 가리려고 합니까? 진자 모습이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연기를 해서라도 가식와 외식을 해서라도, 다른 이들의 인정받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비판하지 말라는 명령이 왜 “외식하는 자”라는 말로 연결될까요? 가만히 이 말씀을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왜 그런가.. 바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세상의 것들, 명예, 돈, 지위,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가 스스로 얻어 그것을 통해 자기의 가치를 찾고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남을 비판하는 삶”을 살수 밖에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비판합니까?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허물을 작게 가리고, 남의 허물을 크게 드러내야 하기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합니까?  얼마나 더 인정을 받고, 소유하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가 곧 자기자신이기 때문에, 결국 그런 사람은 그것의 노예가 되어 그것을 얻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걱정과 염려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해서라도 그것을 더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문맥속에서 “비판하지 말라” 는 것은 바로, 외식하는 자로, 그러한 회칠한 무덤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염려와 불안속에 “남을 비판해서라도” 자기가 인정받고자 살아가는 자기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불쌍한 자와 대조적으로 보여주는 삶의 모습이 바로 7-11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들, 자식, 그리고 아버지”.  이 단어들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바로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익을 서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이만큼 하면 이만큼 줄께 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받게 되는 것은 “간절함”이 아니라, “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그의 자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9-11절에는 또 대조하지요. 9절은 떡과 돌을, 10절에는 생선과 뱀을 말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틴지역에는 만져보기 전에는 빵과 돌을 구별하기 어려운 그러한 둥근 돌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돌이 빵과 비슷해보여도, 빵을 달라고 하는데 떡을 줄 아비가 없다는 이것을 통해,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가 떡을 달라는데, 먹을 수 없는 돌을 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1절에는 더 중요한 대조가 이루어집니다. 그럼에도 육신의 아버지는 완전히 선할 수 없는 존재라는 한계와, 그 한계 가운데서도 좋은 것을 주는 것과 선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이 주시는 좋은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좋은 것을 헬라어로 “도마타 아가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아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가다는 좋은 것, 도마타는 선물입니다. 즉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좋은 것은 “좋은 선물”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는 것은 “아가다, 그냥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줄까요?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즉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좋은 선물이 아니라, 좋은 것” 즉 절대적으로 좋은 것, 그 자체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상대적 유익이 아니라, 절대적 좋은 것… 그리고 누가복음 11:13절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그 속에서 마지막 12절을 우리가 바라봐야 합니다. 12절이 바로 이 말씀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자는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무슨 말인가요? 전혀 앞의 이야기와 결론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이 절대적으로 좋은 것, 즉 성령을 받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 그들은 자신 또는 재물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며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혀 자기를 입증하기 위한 남의 허물을 드러내고 비난하는 자들과 달리, 어떻게 산다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고 인정해주고, 섬기며 대접하는 그 자리에 선다는 것입니다. 


대접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남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 그들을 섬기는 것은, 대접 하는 그들이 대접받는것에, 더 높은 것에 올라가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남을 비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난을 해서 그들을 깍아 내릴 필요가, 자신이 더욱 빛나보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다른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라는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졌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럭싱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 즉 이러한 삶의 모습, 낮은 자리에서 다른 이를 대접하며 섬김는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전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함이 우리로 모든 것을 가진자로, 다른 이들과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의 가치를 다른 것에 구하지 않게 하기 떄문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주시는 절대적 좋은 것, 구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우리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 남은 비난하지 않고, 섬기는 삶, 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1. 오늘 우리의 가치를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됨,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가치를, 정체성을 세워갈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2. 남은 비난하여 내가 높아지려는 어리석음 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자녀됨이라는 정체성 속에서 남은 나보다 더욱 높이며 섬기며 대접하며 사랑하게 하여주시옵소서.
  3.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주님, 나눔과 섬김으로 아픔과 상처로 얼룩진 이땅을 회복시켜 가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