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라기 1:1-5절
제목: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찬양: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래서 불안함과 불평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시금 “내가 너를 사랑한다” 말씀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으로 인해 감사드립니다. 주님 그 사랑의 음성을 오늘 이 아침에도 우리가 듣기를 원합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이 사랑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 이 변치 않는 사랑을 그들로 알게 하시고, 그 갈한 목마름을 채울 수 없는 웅덩이로 채우려하는 모든 어리석음을 멈추게 하여주시옵소서. 오직 그 넘치는 풍성한 사랑안에 거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이 시간에 특별히 기도하는 것은 주님 그 사랑의 음성이 전쟁으로 고통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스리랑카와 미얀마와 같은 나라들에 들려지길 기도합니다. 주님, 인간의 탐욕과 욕심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봅니다. 주님 그러나 그들이 아닌, 우리가 그러한 자입니다. 너그럽고 친절한 모습속에, 그 일은 내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가난에 죽어가고 있을때에도, 여전히 나를 위한 삶만을 생각하고 고집하는 이 잔인하고 끔찍한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그들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기도하며, 작은 믿음으로 그들을 섬길 때, 주님 그 땅에 하나님의 변치않는 사랑의 음성이 들려질 줄 믿습니다. 회복될 줄 믿습니다. 주님 우리를 사용하여주시고, 이땅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주님.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의 자녀들이 자신들을 위해 공부하지 않게 하여주시고, 주님의 소명을 따라 이땅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공부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땅을 화평하게 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주님 우리 아이들을 만나 주시옵소서. 그 어떤것보다 중요하고 급하며 소중한 것이 주님을 아는 것이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 부모로서 우리의 삶이 예수를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하시고, 우리 아이들이 말씀과 기도에 최우선을 두고 살아가며 주님을 깊이 경험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나눔과섬김의교회가 기도하는 교회, 세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모든 섬김이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셔서, 우리의 시선이 주님을 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이 아침에 주님앞에 무릎꿇고 나아갈 때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일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우리가 묵상할 말씀은 말라기 1장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미안해 난 더 이상 널 사랑하지 않아”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헤어지는 연인의 이 대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관계는 곧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끝은 곧 관계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말라기의 사람들... 1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지 약 10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엄청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그들은 돌아왔습니다. 몇 번의 실족과 넘어짐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들을 일으키셨고, 그들은 다시 소망을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여전히 그들에게는 다가올 새 시대에 대한 희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희망을 비웃기라도 한 듯, 성전이 회복되고, 성벽은 재건되었으나, 그들의 현실은 여전히 혹독하였고, 그들은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 그저 생존을 위한 생존의 삶을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느꼈을 그들의 마음이 바로 말라기서 가운데 하나님과 그들안에 있는 여섯 번의 오고가는 논쟁안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첫 번째 논증은 그 모든 논쟁의 시작이자, 또한 나머지 논쟁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그러자 그들이 머라고 반응하였습니까?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 논쟁은 그 나머지 논쟁, 성전과 제사, 이방인과의 통혼, 도덕적 타락, 십일조, 하나님의 경외하는 삶 등.. 이러한 논쟁의 핵심이고 본질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외적인 지표들은 사랑이 붕괴되었기에 일어나는 당연한 파생물이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은 결국 “사랑”의 문제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느껴지고 있습니까? 세상이 말하는 사랑, 노래만 틀어도 흘러나오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도 마치 우리에게 진부하게 되어버리고, 화석처럼 굳어버린, 그래서 그 어떤 감격과 기쁨이 사라져 버린, 그저 신앙이 이론처럼 되어버리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 말을 들을 때에 어떤 감격, 어떤 마음이 드나요?? 아니면
그냥 어떤 명제처럼, 딱딱한 이론처럼 들려지고 있나요...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이 말은 사실 굉장히 역동적인 것입니다. 스바냐 3장 17절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갇운데 계시니.. 그가 너를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즐거히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아가서에서는 이 사랑을.. “많은 물도 끄지 못하는.. 불같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사야 62:5절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우리안에 이 사랑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어떻게 주께서 사랑하셨습니까?” 비아냥, 적대감, 불신과 회의감.. 그들의 인생을 거칠었고, 그속에 그들의 마음은 점점 딱딱해져갔습니다. 혹시 우리 속에 이런 마음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포기든 타협이든... 하나님의 사랑이 머, 밥먹여 주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반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분명한 것은 마치 그들이 사랑의 피해자처럼, 이별의 통보자인 것 같았지만, 사실 그들은 사랑의 피해자가 아닌, 사랑의 가해자라는 것입니다. “난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 이별의 통보는 하나님이 아닌, 그들이 하나님께 한 것입니다. 이별의 가해자... 자기의 실체를 망각한 자들이, 그 속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비아냥과 적대감.. 회의와 불신의 말이었습니다.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줍니까? 우리가 우리의 실체를 망각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 사랑을 배신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바로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에 대한 반문에 대해 하나님께서 머라고 말씀하시는가? 여호와께서에서, 즉 에돔의 운명을 말하면서,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변증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어떻게 사랑하였는지. 보여줄게”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어떻게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는지를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관계가 즉 사랑인 것처럼, 하나님인 그들을 소유로 삼으셨다는 것, 그 소유라는 특별한 관계는 즉 그들을 사랑했다는 것인데...이스라엘에게 베풀어주신 영광스런 관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은그, 자체가 엄청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기준은, 상황이나 환경의 어떠함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관계성의 보존, 변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의 소유됨이 사랑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로마서 5장에서 언급되면서 그 관계의 근거가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어떠함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 즉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대체 우리가 누구입니까? 영원토록 나그네요 행인이요, 이방인이요, 백성이 아니라, 긍휼을 얻을 수 없고, 허물로 죽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어떻게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자가 되었는지를 자각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매몰되어 살면서, 우리의 상황속에서 “하나님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회의하고 이 패악한 본성을 깨드리는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안에 이 악한 본성을 깨드리는 힘, 우리가 도대체 어떠한 사랑을 입어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입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자각하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죄인을 부르시는 신비와 그 영광스런 관계로 부르시는 아름다움을 헌신짝처럼 간단히 내버릴 수 있는 비극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 사랑의 경의로움을 나의 지극히 작음과 그분의 크심속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대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가슴에 새기며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잡혀가는 것을 보며 좋아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에돔을 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애돔의 몰락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그들의 몰락은 곧 하나님의 돌보심,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시 죄악 때문에 마땅히 깨어져야 할 그 관계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랑은 그들의 신실함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함이라는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이별통보를 내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소유, 즉 자녀되라면, 그 관계가 보전되었다면,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어디있는가..하는 것을 선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우리는 이 영원하고 깊은 결속, 영광스런 관계의 증인입니다. 마음이 아픈 것은, 우리는 이 영광스런 관계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지켜야 할 것은, 이 특별한 권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와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환난도 이겨낼 수 있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코로나가, 그 어떤 경제적 정치적 위기가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자녀됨의 그 영광스런 관계를 잃어버리는 것은 가장 큰 위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차임 다시한번 그 사랑이 만들어내는 그 영원한 결속, 그 관계가 날마다 새롭게 되고, 그 은혜를 회복하는 우리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 상황과 환경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변치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하나님의 자녀됨의 변치 않는 그 사랑이 있음으로 인해 감사와 찬양이 내 속에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 주님, 오늘 이 자녀됨의 사랑이 확신이 필요한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 의심과 불안속에서 살지 않도록,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시고, 그 사랑안에 평안함을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 3.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전쟁속에 말할 수 없는 고통가운데 있습니다. 주여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 땅의 평화가 찾아오고, 주님의 사랑으로 회복시켜주시옵소서. 전쟁이 멈추어지게 하여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