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에스겔 40:1-49
찬송가 123장 저 들 밖에 한밤중에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에스겔 40장은 바벨론으로 처음 유수되어 갔을 때로부터 25년이 지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 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에스겔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셔서 대단히 높은 산 위에 두셨습니다. 마치 이것은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한 인물도 모세와 에스겔 뿐입니다.
그 산 위에서 에스겔은 천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안내하게 됩니다. 사실 에스겔이 성전을 안내받으며 둘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가증한 것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릅니다. 43:4입니다.
[겔43:4]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에 돌아오는 것으로 끝이나죠. 무엇을 의미합니까?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난 줄 알았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숨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 이후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의 죄로 인해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를 죄의 구덩이에 밀어넣고, 성령이 아닌 세상의 쾌락을 좇은 것이 나에게 화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반드시 건져내십니다. 주께서 택한 자를 잊지 않고 찾아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께서 나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것인지 나의 죄로 인한 것인지를 점검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회복시켜 주실 날을 기대하는 이 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5절에서는 에스겔이 처음으로 본 곳을 소개합니다. 그 곳은 바로 담입니다. 성전 지역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말하는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담은 아주 큰 담이었습니다. 두께와 높이가 6척이었습니다. 약 3.2m 정도 되는 것이죠. 아주 크고 두꺼운 담이었습니다. 담이 무엇입니까? 담은 공간을 통제하고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밖과 성전의 속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단절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예절과 의식을 중요시하다 보니 이것이 지나쳐 ‘허례허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것이죠.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스몰웨딩 등의 새로운 결혼문화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회도 보이는 것에 힘을 많이 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을 갖지 않는 것 아닙니까?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에 투자하지 않고 그것으로 나누고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죠. 참 좋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거기에는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담을 높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 등으로 우리의 화려함을 드러내고, 우리의 규모를 자랑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외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외적인 것을 지나치게 파기하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공예배를 드립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딱딱하기도 하고,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형식을 많이 간소화 시킨 예배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왜 존재합니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형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형식을 너무 평가절하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 전의 순서는 마치 오프닝 무대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사도신경을 통해 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마음을 모아 대표자가 나와 기도를 하는 시간을 마치 다음 프로그램 중간에 방영되는 TV 광고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설교가 끝나면 예배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형식만 있는 예배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식만 강조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이 무너지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바른 방법이 아니죠. 율법에 얽매여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겠다며 담을 무너뜨려 아무런 경계없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참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모습에 담이 있습니까? 기준이 있습니까? 외적인 것을 지키지 못하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형식과 내용을 고루 갖추어 균형있는 교회.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제목
- 내가 지은 죄로인해 고난과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주께서는 택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회복을 꿈꾸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는 교회. 균형이 잘 잡힌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