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 42:1-22
찬송가 449장 예수 따라가며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도움을 받기 위해 상담자를 찾아온 사람을 ‘내담자’라고 합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큰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조언을 구하거나 답을 찾기 위해 찾아오는 성도들이나 후배를 종종 맞이하게 됩니다. 일종의 ‘내담자’를 만나는 것이죠. 그런데 가끔은 그들과 대화를 하거나 대화 후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을 보면 ‘저 분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찾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상담이지만, 실상은 지지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마음을 바꿀 생각이 처음부터 전혀 없지만, 동일한 생각인지 아닌지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 속의 요하난 무리들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요하난과 그의 일행이 애굽으로 도망을 가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피신을 하는 것이죠. 긴박한 상황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나아갔습니다. 왜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기도해 주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갈 길과 할 일을 알려주시기를 원했기 때문에 급한 상황이지만 예레미야에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레미야도 긍정적으로 응답을 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뭐라고 합니까? 5-6절입니다.
[렘42:5-6]
5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가운데에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이 되시옵소서 6 우리가 당신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보냄은 그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좋든지 좋지 않든지를 막론하고 순종하려 함이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면 우리에게 복이 있으리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 음성에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좋든지 좋지 못하든지 어떠한 말씀을 하셔도 순종하겠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목소리를 순종하는 것이 복이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것에 대해 순종을 맹세하는 것은 아주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우리 앞에 있을수록 우리는 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내가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레미야가 기도응답을 받은 이후에 벌어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예레미야의 기도가 응답 되기까지는 10일이 걸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무엇입니까?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 즉시 주어질 때도 있지만,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지금이 어떤 상황입니까? 급하게 피신을 떠나는 길에 잠깐 들린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 응답까지 무려 10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은 ‘며 칠이내’ 또는 ‘언제까지’라는 기한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시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시점에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그 기도제목에 당장 응답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적절한 시점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내하며 기도하십시오. 기도하시면 주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기도의 응답을 구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다시 돌아가서, 예레미야는 10일 후에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이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10절
[렘42:10] 너희가 이 땅에 눌러 앉아 산다면 내가 너희를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무슨 뜻입니까? 남은 자들이 유다에 머무른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를 처벌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세우고, 심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죠. 심판의 결과로 무너뜨려졌지만, 구원의 시대를 맞이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해 주십니까?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내린 재난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내린 심판결정을 이제 의지적으로 바꿀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는 말씀입니다. 요하난의 무리가 이 땅에 그대로 머물면 이들에게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시작될 것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유배를 면하고 가나안에 남겨진 자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시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 곳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한 무리는 가나안 땅에 남은 자들이죠. 그리고 또 다른 무리는 바벨론 유배민들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 독자적인 공동체를 발전시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나뉘다 보니 중요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엇입니까? ‘이들 가운데 누가 이스라엘의 미래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 다시 말해서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라는 문제입니다.
그 문제의 답이 무엇입니까? 누가 이스라엘의 미래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습니까? 방금 읽은 10절이 이 문제에 대한 답입니다. 가나안 땅에 남은 자들이 그다랴의 암살로 복잡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지만, 애굽으로 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그대로 머물고 있으면 이스라엘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내려가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칼과 기근에 의해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하난 무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응답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고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다까? 19절 이하를 보면, 이들은 완고했습니다. 순종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미 답을 정하고 찾아온 것이죠.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싶었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응답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든지 여호와의 뜻대로 실천하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하나님의 의지가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자 순종을 거절했습니다.
하나님은 섬김의 대상이지 이용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치 카드를 뽑아보고 좋으면 취하고, 좋지 않으면 버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을 마음대로 취하고 버려서는 안됩니다. 오늘을 살아갈 때에 주께서 어떠한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에 대해 어떤 응답을 주시든지 주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기도의 응답이 더디다 할지라도 주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시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적절한 시점에 주어진다는 것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 나의 생각과 기도의 응답이 다르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