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4일] 이사야65장 - 묵상과 기도

by nasum posted Aug 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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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 : 험한 시험 물 속에서 (찬송 400장)

말씀 : 이사야 65장 1~25



이사야 65장은 이사야 전체 말씀의 요약입니다. 긴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응하시는가? 말씀하여 왔습니다. 이런 주제들이 오늘 65장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 당시 사람들과 우리는 어떻게 다른지 또한 이사야 시대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오늘날 하나님은 얼마나 똑같으신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보응하신 것과 오늘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보응이 어떤 것인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복, 저주와 축복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그런 것들을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1절 보라.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좀 복잡한 문장입니다만 하나씩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여기서 나는 누굴까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물음을 받았으며, 하나님은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르면 대답하시는 분입니다. 

찾아냄 되었으며, 하나님은 누군가 찾으면 여기 있다고 나오시는 분입니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 나타나시는 분입니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자신이 여기 있다고 여기있다고 자신을 열어주십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는 자를 너무 너무 만나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이 부분만 보면 굉장히 사이(관계)가 좋은 것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인데 반면에 인간은 어떻습니가? 

나는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데요. 하나님을 구하지 않고 인간들은 우상을 구하고 돈, 명예를 구해요 헛된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 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찾지도 않습니다. 먹고 사는 일에 바쁘고, 자기 명예와 부를 쌓는 일에 바쁩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싫은거에요.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없어. 이렇게 생각합니다.



1절의 이런 내용이 바로 이사야 전체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와주고 구원하려는데 이스라엘은 그런 하나님에게 무관합니다. 그리고 오직 세상 것에만 관심을 갖고, 세상의 헛된 것을 좇아 다닙니다. 


이정도 되면 하나님이 자존심상해서... 도대체 너희 뭐가 잘났냐? 기분 나빠야 되는데

하나님의 반응은 그렇지 않습니다. 

2절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내가 종일 손을 펴서... 불렀나니 

양팔을 다 벌리고 나에게 와라. 종일 손을 펴서 이스라엘을 부르고 또 오늘 우리를 동일하게 부르십니다. 이스라엘과 우리가 어떤 모습인데도 부르십니까?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는 길을 가는 패역한 백성들인데도 부르십니다.


1절도 모순이지만 2절도 모순입니다. 

하나님은 종일 손을 펴고 우릴를 기다리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다 생각을 몇 번 합니까?  

우리가 생각하는게 주로 뭐냐? 열 번 스무번 생각하는게 뭐냐? 

하루종일 인터넷, 보면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벌까.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지킬까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대부분의 걱정은 코로나입니다.   

하루종일 걱정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내 걱정, 내입에 들어갈 것, 내 손에 잡을 것만 살핀다. 

이스라엘을 욕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주인이에요. 내 멋대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위해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믿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믿고 살고 있는가. 

우리의 안타까운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3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 


동산에서 제사한다. - 성전에서 제사해야죠. 그런데 내맘대로 하고 있습니다. 뭐하러 멀리가냐? 내 뒷동산에서 하면 더 편하다. 왜 내 편의대로 하면 안되냐? 내가 좋은대로 살련다. 

이게 동산에서 제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곧 산당에서 제사 한다는 것입니다. 산당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주범이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을 높이려던 제사가 인간중심으로 변한 것입니다. 

굿할 때 돈을 더 주면 더 복을 빌어 주듯이 복을 더 받고 싶으면 제사를 한 번 더 지내라. 이것이 바로 산당 제사입니다.


벽돌위에 분향하며 = 원래 다듬지 않은 돌에서 제사를 해야 합니다.

돌을 다듬으면서 우리의 의도가 들어간다. 마치 우상을 만들 듯이 우리의 의도가 들어갑니다. 나의 공로를 내세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도를 넣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어야 해. 하나님을 조작하고 내 입맛에 맞는 하나님을 만듭니다.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불러일으키는 백성 - 

내 주장, 욕심, 입장만 내세우는 제사를 드리니 하나님의 노를 일으킵니다. 

 

4절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것들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무덤 사이에 앉으며 – 죽은자와 교통하는 것입니다. 일종의 영매입니다. 접신하는 것은 가증한 것이라고 율법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처소에서 밤을 지내며 – 사교 집단들이 은밀한 장소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밤을 새웁니다. 열심히 특심합니다. 하지만 열이 중요한 것 보다는 누구에게 제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돼지고기를 먹으며 – 돼지고기 먹는 것은 율법이 금하고 있습니다. 돼지는 부정한 짐승이라고 율법이 말합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유대 민족을 말살할 때 성전에서 돼지 피로 제사를 드렸듯이 가장 가증한 죄악입니다.


5절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 하나니 이런 자들은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이렇게 온갖 가증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거룩한 자라고 합니다. 

나는 너와 달라! 종교인들의 아집과 교만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거룩하다고 해요. 교회 다니니까 나는 신실하다고 해요. 차라리 교회 다니지 않으면 회개라도 할 수 있는데 자기가 거룩하다고 생각하니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너는 네 자리에 서 있고 - 너는 거기 서있어 나는 거룩한 사람이야. 종교인들의 아집과 교만은 말로 할 수 없어요.

차라리 교회를 안다니면 나아요.  교회, 예배, 봉사 하면서 이런다는거에요. 

가까이 오지마. 선을 그어버린다. 독선이다. 이런 사람 많다. 

이당시의 사람들의 모습이 오늘날 모습이다. 


난 아니라고 할 수 있나요.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는거에요. 이런 자들은 누구라고요?

코에 연기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만화 같은 곳에 보면 화가 난 모습을 그릴 때 코에서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을 그리잖아요.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향하여 분노하세요. 종일토록 분노하세요.


마지막 6절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보라 이것이 내 앞에 기록되었으니 내가 잠잠하지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하리라 

반드시 보응하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분입니다. 무서운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않고 내 욕망대로 살 때도 하나님은 기다려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길 원하셨다. 그런데도 우리가 계속 죄를 범한 것이다. 그렇다면 보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인간의 보응은 피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보응도 피를 부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응은 그 결과가 전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가?  


17절.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보응은 인간들처럼 그저 이에는 이, 눈에는 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시지만 그 목적은 이 땅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목적은 회복입니다.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우리 연약을 회복하고 새롭게 우리를 창조하십니다. 인간은 복수하고 관계를 모두 끊지만 하나님은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이전 것은 기억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기억치 않을 정도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들지 않고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는 자라도 그가 회개하면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와는 그 보응의 차원이 다르다. 


18,19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

회복의 새창조의 결과는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을 분노하게 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노래하며 산다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 입의 노래는 나의 상황과 환경에 대한 걱정과 근심, 건강에 대한 염려와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그 놀라운 역사를 날마다 노래하며 살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백성 된 것을 기쁨으로 삼는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 전체 요약입니다. 정리해 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늘 우리를 만나길 원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외면합니다. 외면할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합니다. 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보응하십니다. 하나님의 보응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제와 다릅니다. 어제는 나밖에 몰랐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다가오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응하신다. 새로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관계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나기를 희망하신다.  


신실한 하나님. 새로운 기쁨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다. 

그분이 우리 구속주이시다. 그 분을 바라보면서 오늘 힘있게 살아가십시오. 

우리의 모습을 죄악된 모습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말씀을 붙잡고 여러분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하시길 바란다. 



기도)


1)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늘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부름에 반응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2) 하나님의 보응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