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예레미야 2:1-37
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사사기 2장에서는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서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세대라고 표현합니다. 그저 세대가 바뀐 다음 세대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세대라는 것이죠. 한 민족이긴 하지만 다른 역사가 쓰여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새로운 역사.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바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와서 한 일은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신. 바알을 쫓은 것입니다. 사실 바알은 광야에서는 필요가 없는 신입니다. 생산과 번식의 신. 풍요다산의 신이었기 때문에 농사를 짓지 않는 광야에서는 의미가 없는 신이었죠. 그러나 농경사회에 속한 가나안에서 생산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 아닙니까? 그렇다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선택한 것입니다. 스스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다음 세대의 길을 포기하고, 여호와와 결별한 다른 세대의 길을 스스로 걸어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자들입니다. “그의 소산 중 첫 열매(3절)”입니다. 수확의 처음 열매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땅 위의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자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광야기간에는 그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를 ‘신혼 때의 사랑’으로 기억하십니다. 그러나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찼던 신혼기간이 지나자 이스라엘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남편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 가나안으로 데려오셔서 좋은 열매를 먹게 하셨던 여호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간음입니다. 영적인 간음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13절.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자 스스로 물을 가둘 수도 없는 웅덩이를 판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한 짓은 생명의 원천인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생명을 줄 수 없는 우상을 섬긴 것이죠. 큰 죄악입니다. 생명을 갖고 싶고, 생명을 기대하면서도 참 생명 되신 하나님을 버리는 모순을 범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모순은 우리의 삶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문제가 생기거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죽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던 것처럼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아주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거나 가진 것이 많아지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일. 즉, 예배 드리는 일이 귀찮은 일로 전략해 버립니다. 하나님을 찾기보다 주변의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의존하기보다 정보와 나의 실력과 나의 판단을 의지합니다. 인생의 역설입니다. 생명을 부르짖으면서 생수의 근원되신 주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행위입니다.
저는 우리가 물을 가둘 수 없는 웅덩이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근원되신 주를 의지하고 섬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23절과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본인들의 죄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간음을 하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라고 자신있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런 말이 나옵니까? 이들의 입장에서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드릴 예배 위에 바알종교를 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위에 바알을 더한 것이죠. 혼합주의입니다. 그래서 23절에서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의 뒤를 따르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골짜기에 난 길을 잘 살펴보면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하는 짓을 가서 보라는 것입니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죄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온전하지 못한 모습 속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회는 불법이 자행되었습니다. 34절.
[렘2:34] 또 네 옷단에는 죄 없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었나니 그들이 담 구멍을 뚫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이 모든 일 때문이니라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계약을 파괴한 자들의 마음에는 가난한 자들의 고난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그저 이웃은 탐욕의 대상입니다. 빼앗고 착취하기 위해 존재하는 자들로만 보입니다. 약육강식의 원리. 힘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변해 버립니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본인만 재앙 속에 빠지고, 본인만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가진 무서운 탐욕으로 인해 사회 자체를 어지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종교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따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가 파괴되면 모두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 이웃과의 관계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구분해서 생각하지만 십계명은 그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린 결과가 무엇이라구요? 이웃에 대한 불법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웃은 착취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내 힘과 탐욕으로 그들을 짓밟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어떤 자세로 이웃을 대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태도가 곧 나의 신앙입니다.
하나님만 따르며 가난한 자들의 고난에 마음을 기울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생명을 찾으면서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을 용서하시고 생명이신 하나님만 신뢰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바알을 동시에 믿는 혼합주의가 있지 않은지 점검하게 하시고, 우상숭배의 결과인 이웃에 대한 탐욕이 있다면 돌아서서 가난한 자들의 고난에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