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8:1-14
찬송가 418장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 또는 교회에서 행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출석률을 신앙생활의 척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런 제의적 행위 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야곱의 집”이라고 표현되는 오늘 본문의 공동체 역시 종교적 삶은 아주 모범적인 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는 아무런 흠 잡을 것 없는 종교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었다는 것이죠.
이들은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께 “의로운 판단”을 구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금식도 행했습니다.
사실 금식은 극단적인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금식이 내 생명을 담보로 협상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금식과 같은 종교적 활동이 그것을 행하는 자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얻고 싶은 결과를 위해 금식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잘못된 모습입니다. 1절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모습은 허물이고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인정하고, 대견스러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로움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본인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는데 왜 봐주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스스로 괴롭게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오히려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3b)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금식을 하면서 하고 싶은 일은 다하고, 일꾼들을 억눌렀다는 것입니다.
포로기 이후의 시기에 금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금식을 할 수 있습니까? 일반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굶는 것을 밥먹듯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잘 사는 사람들만 금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금식이라고 하는 것이 잘 사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종교적 행위였다는 것이죠. 그렇다 보니까 부자들은 금식과 예배를 통해 온갖 경건한 척은 다 하면서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을 더 착취하고, 빼앗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 밖에 나가서는 금식중에도 싸움하고, 주먹이나 휘두르고 다녔습니다(4절). 성전 안에서의 종교적 열심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담 너머서의 삶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금식하는 자들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주일에 예배 드리고 출석 체크만 하면 ‘내가 할 신앙생활은 다 했다.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처럼 금식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그에 합당한 복을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잘못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기가 우리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배고픔을 참아가면서 온갖 근심이 있는 얼굴로 서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무엇입니까? 6절.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주고, 억압당하는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입니다.
아마 빚을 갚지 못해서 강제로 고용살이를 하는 경우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포로기 이후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흉작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농사를 망치면 이제 비싼 이자를 내고 곡식을 빌려야만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다음 해가 되어도 그것을 갚지 못하면 노동을 해서 빚을 갚아야 했죠. 농경지를 상실하고, 가정은 파괴되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을 살며 소망도 즐거움도 없이 살아가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지 않으니 신앙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약자들의 목숨이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손. 사회적 강자들의 손에 있게 된 것이죠.
이들을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경제적 독립을 통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58: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풀어주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굶주린 자에게 내가 가진 빵을 떼너 나눠주고, 집이 없어 떠도는 자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옷을 주는 것. 또한 가난한 친척을 보고 피하여 숨지 않는 것. 다시 말해서 가난한 친척을 돕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금식이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내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과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금식은 공동체를 돕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주변을 돕는 것입니다. 내가 먹을 수 있지만 그것을 줄여서 나누는 것. 내가 더 많이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나눠가지는 것. 그것이 참된 금식.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입니다.
그것을 행하는 자들은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입니다. 가난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둠을 뚫고 새벽빛이 나오듯이 슬픔과 두려움이 기쁨과 평안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급속하게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참된 금식을 행하는 자들이 주를 부를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시고, 인도하시며, 뼈에 힘을 주실 것입니다. 행위만 남아있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물댄 동산 같으며,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이 될 것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손도 쓰지 못하는 나라가 우리 옆에 있습니다. 코로나 사태도 너무나 힘든데 미얀마 사태, 남아공의 폭동,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이 곳 저 곳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 개인적으로 나의 도움과 나눔이 필요한 곳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나누고, 베푸는 참된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참된 금식은 공동체와 주변을 돕는 것입니다.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보게 하시고, 실질적인 도움(나눔)을 통해 참된 금식을 실천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 코로나 바이러스, 미얀마 사태, 남아공 폭동,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하루속히 회복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