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이사야 53:1-12
찬송가 254장 내 주의 보혈은
미국에서 과속운전을 하다가 1살 된 아기와 젊은 엄마를 치어 숨지게 한 24세의 남성 운전자가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중계가 되었습니다. 3년 간의 재판 끝에 24년의 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재판 영상은 당시 사건이나 선고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이유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살인죄로 법정에 서 있는 이 남성의 얼굴입니다. 이 남성은 젊고, 잘 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일부 여성들은 “교도소에 갇히기에는 얼굴이 너무 아깝다. 형을 줄여달라.”, “잘 생겼으니 봐줘라.” 등의 황당한 요구까지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에 큰 비중을 둡니다. 외모가 경쟁력, 외모가 실력처럼 비춰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교자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외모를 통해 그의 신학적인 부분까지 한 번에 평가를 합니다. 잘생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설교가 훨씬 권위있는 말처럼 듣리기도 합니다.
이런 문화에 있어서 고대 사람들도 자유롭지는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외적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관 이상의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울, 다윗. 그리고 압살롬을 소개할 때에도 외모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외모는 중요한 기준이자 능력의 척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출연한 여호와의 종은 그렇게 신뢰 가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외모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새순처럼 나약하고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전혀 아름답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그 어떤 장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였습니다.
3절에 보니까 질고를 아는 자. 다시 말해서 만성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자였습니다. 고통과 질병에 시달리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종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께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종이 전하는 것을 믿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호와의 팔이 누구를 위해 나타났냐고 반문을 했습니다(1절).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12:38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12: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복음이 무엇입니까? 좋은 소식. 나를 살리는 소식아닙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외적인 치장을 하지 않은 순수한 복음. 인기를 위해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복음은 오히려 다수를 빗겨가게 만드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어떠함보다 복음 그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 그 자체를 사랑하고, 그 자체를 믿고 따라야 합니다. 복음 그 자체를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이들은 여호와의 종을 배척했지만 하나님은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스스로 짊어지고 가야만 했던 죄의 짐을 때어내어 여호와의 종에게 얹었다는 것입니다.
6절에서는 죄를 이렇게 표현 합니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는…” 종을 무시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종을 무시했던 그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갔습니다. 길을 잃은 양처럼 본능이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길 잃은 양의 끝은 절망과 죽음입니다. 죄는 각자 자기 길로 가는 것입니다. 판단의 중심에 자기를 놓고 그대로 따라 가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철저히 이기적인 모습입니다.
이 죄를 하나님은 자신의 종에게 옮겨 버리셨습니다. 각자 제 길로 갔기 때문에 스스로 짊어진다 해도 아무런 투정을 부릴 수 없는 그 죄를 여호와의 종이 짊어지고 죽음으로 가도록 하나님이 옮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은 고난과 죽음의 부당함에도 아무런 항거를 하지 않습니다. 입을 때지 않고,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학대를 받았지만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으며 자신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을 내어줄 뿐이었습니다.
악한 일을 한 적이 없었지만 악한 자처럼 취급을 받았고, 거짓을 말한 적이 없었지만 악한 자들과 함께 묻혔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기에 멸시와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죽기까지 순종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종이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난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죄로부터 놓임을 받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 의해 거절당했으며 십자가를 지고 죽임을 당할 때도 부정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며 대신해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살았고,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죠. 이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 메시지가 너무 강하다 보니까 정작 본문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이 바벨론 포로 시기에 활동했던 무명의 예언자였다는 사실은 놓치고 있습니다. 그는 비참한 모습을 가진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여호와의 구원 계획이 성취되었습니다. 그가 감당한 엄청난 고난. 그리고 희생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수 많은 고난이 우리의 잘못으로 주어질 때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짐으로 고난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 고난과 철저한 희생. 그리고 주를 향한 순종의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우리 앞에 고난이 놓여져 있습니까? 내가 당하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에 맞닿아 있는 이 고난을 통해 주께서 어떤 일을 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생각하며 희생과 순종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많은 이들은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했지만 여호와의 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깨닫고 믿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 나의 삶에 맞닿아 있는 이 고난을 통해 주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을 깨닫게 하시고, 희생과 순종으로 하루를 살아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