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기야의 실수
(이사야 39장)
전장에서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얼굴을 벽을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여 15년 수명을 연장한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히스기야가 경험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소식을 들은 바벨론왕 므로닥발라단이 보낸 축하 사절단을 맞이하는 히스기야의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기뻤습니다. 죽을 병도 낫고 당시 신흥 강대국으로 부상하던 바벨론의 왕이 축하 사절단까지 보냈을 정도니.. 어깨가 으쓱해져있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근데 이 때 히스기야는 크나큰 실수를 합니다. 죽을 병에 걸린 그를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15년 수명을 연장해주셨습니다. 그러면 히스기야는 남은 평생을 하나님께 영광올러드리는 삶을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히스기야는 바벨론왕이 보낸 축하 사절단에게 자신의 왕궁에 있는 보물들을 자랑하고 자기를 과시합니다.
지금 세상에서 떠오르는 강대국인 바벨론을 대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간증해도 모자랄 판에.. 그들을 불러서 자신의 무기고와 보물창고를 다 열어서 보여 주면서 그것들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4절을 보세요. 이사야가 와서 히스기야왕에게 자초지정을 물었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여기서 히스기야는 두번이나 ‘내 궁전, 내 창고’라고 말하면서..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6절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기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 이라고 말하면서.. 좀 전에 히스기야가 두번이나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그래도 맞받아쳐서 말하기를 ‘그래 너의 집, 너의 조상들이 쌓아둔 것’ 이렇게 정확하게 2번 반복해서 말함으로 히스기야의 잘못을 짚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집이고 네 소유이니, 이제 그것들이 남의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니 하나님이 지키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의 모든 것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유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전히 나의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그것들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유도 아닌 것을 지키실 의무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 자기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내가 소유하는 것이 나의 소유라면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지키지 못할까봐 불안하고 두렵고 매번 노심초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권이 이전되었다면 이제 그것들은 나의 책임이 아닌 하나님의 책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된 우리가 자녀들을 바라볼 때도 혹 내 자식, 내 소유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 소유이니 우리가 끝까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두렵고 초조한 것입니다.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부모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내어 맡기고, 이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할 때, 그 때 부터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끝까지 인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우리 마음도 더 이상 조급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렵거나 불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는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독자로 하여금 히스기야 왕에게 대단히 실망하게 만드는 대목이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하나님께서 유다의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사39:8]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소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내 살아 생전에는 이런 재앙들이 안 일어나고 평안하고 내 왕위가 견고하다니 그 말씀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라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것도 히스기야는 남유다의 몇 안되는 선한 왕 중에 한명입니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이사야가 왜 하필 이 이야기를 히스기야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에 배치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스토리가 이사야 36장부터 39장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시기적으로는 사실 38,39장의 이야기가 36장, 37장 이전에 있었던 일인데.. 이사야가 굳이 이 내용을 뒤에 배치하고 히스기야에 관한 스토리를 마무리하고 있다는 것은 이사야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싶다는거거든요. 그렇다면 무엇을 강조하고 싶은 것일까요?
이사야 1장에서 남유다의 죄에 대해서 책망하시면서 하셨던 내용이 뭐였는지 기억하세요? 유다의 많은 죄악이 있지만 그 중에 큰 죄에 대해서 지적했던 내용 중에 하나가 바로 유다의 통치자들 리더십의 죄악에 대해서 지적했었습니다. 남유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해서 ‘소돔의 관원들아!’라고 말하면서 지적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역사상 가장 선한 왕이라고 손꼽는 히스기야는 좀 다르냐? /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 역시 믿을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것이죠. 성경은 히스기야 뿐 아니라 어떠한 인물도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어떤 한 인물이 주는 인싸이트를 발견하고 그 인물의 어떤 모습을 보고 배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실 어떠한 인물도 그의 위대함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치명적인 실수를 여러번 했습니다. 다윗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인물의 민낱도 그대로 밝히고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소망이 우리 자신에게 또 어떤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유다와 또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가져다 줄 존재는 무엇이냐!! 바로 다음 장 이사야 40장에서 하나님은 그 존재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한절만 보겠습니다. 이사야 40장 10절입니다.
[사40:10-11]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대해야 할 존재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그 사실을 밝히고 싶었던 것 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그리고 이 땅의 어떤 존재에게서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줄 이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양떼를 모아 품에 안으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내 품에 끌어 안고 이것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며 사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께 내어 맡기고, 주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 믿고, 우리는 주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나의 모든 소유권을 주님께 내려놓게 하소서. 나의 재산, 나의 능력, 나의 자녀까지 모두 주님의 손에 내어 맡기는 믿음이 있게 하소서.
- 우리의 구원의 소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인생을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