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외롭게 사는 이 그 누군가 (찬송 291장)
말씀 : 이사야 5장 1~30
우리는 계속해서 이사야를 통해 심판과 회복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 이사야의 말씀이 심판과 회복, 심판과 회복 반복된다. 1장부터 39장까지 계속 반복된다. 심판은 잠시 있다가 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 하나님이 진노하는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다시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 이사야 5장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기대가 잔득 나온다. 그 기대 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도 또 나온다.
하나님은 기대에 맞지 않는 우리를 심판한다. 그것은 결국 나를 사랑하셔서 회복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1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장은 소위 포도원의 노래이다. 포도원의 노래를 시작하면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자.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사랑하는 자이면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내가 노래한다.
내가 사랑하는 그분에게는 포도원이 있다. 포도원 어디 있나? 심히 기름진 산에 있다. 포도원이 기름진 산에 있으면 뭘 기대하는가? 좋은 포도를 기대한다.
그냥 잘 되겠지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바랬다.
2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포도원 하나 만들려면 1년 걸린다고 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는데만 1년 걸린다. 이스라엘은 광야이다. 돌이 많다. 그 땅은 척박한 땅이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거기다 심었다. 거기 망대를 세웠다.
망대를 세웠다는 것은 잘 지키겠다는 것이다. 주인이 거기 거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안에 술틀을 팠다. 술틀은 돌을 쪼아 만들었다는 말이다.
술틀은 왜 만드는가? 포도를 가지고 좋은 포도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멀리 계획을 한다. 이런 수고를 할 정도로 하나님은 좋은 포도를 간절히, 너무도 간절히 원하셨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한가?
좋은 포도를 기대했는데 들포도를 맺었다.
기대하고 수고하고, 준비하고 애를 썼는데 결국 맺어진 것은 들포도를 맺었다.
원어로 말하면 악취나는 포도이다.
맺기도 전에 썩어 버린 포도를 말한다.
기름진 땅에 땅을 파고 돌을 제거하고 극상품 포도를 심었고 망대를 설치하고 술틀까지 만들었는데 기대를 했는데 기대와는 다르게 들포도를 맺었다.
간절히 기대했는데, 정말 노력하고 모든 수고를 다 쏟아 부었는데 결과가 없으면 어때요? 이해가 안되겠지요. 그래서 주인이 분노한다.
3~6절은 주인의 실망감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아 들어봐라. 내가 이렇게 수고하고 애를 썼는데 이 기름진 땅에 심은 포도가 이렇게 어처구니 없이 들포도를 맺혔다.
이스라엘 나라에 지금도 최고의 특상품은 포도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광야 이다. 감람나무, 올리브 나무가 좀 될까? 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대추야자 좀 있다. 척박한 땅에서 될 수 있는 것, 일조량이 많기 때문에 포도가 난다.
기억하는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광야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이 알아보러 12개 정탐꾼을 보낸다. 정탐꾼이 가져온 것이 뭔가? 헤브론 에스골 골짜기에서 두 사람이 포도 한 송이를 메고 왔다. 그 정도로 포도가 좋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포도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에 뭐가 있나? 먹을 것도 별로 없고, 물도 별로 없다.
이 나라는 건기와 우기가 있다. 우기에만 비가 오기 때문에 우기에만 작물이 나고 건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건기 끝에 사람들이 참고 참고 이제 죽겠다 싶을 때 그 때 나오는 것이 포도이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보릿고개를 넘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아주 귀한 작물이다.
해갈시켜 주는 아주 귀한 작물이다.
잘 될 수밖에 없는 포도를 심었는데 엉망이 된 것이다.
망칠 수 없는 농사를 망친 것이다.
그러면 과연 주인은 누구고? 포도원은 누구인가? 7절 보라.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주인이고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다. 기뻐하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 이스라엘을 가장 좋은 기름진 땅에 심었다. 잘 심었다. 열심히 애써 심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였다.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우리말로 읽으면 느낌이 잘 오지 않는다. 원어에 발음을 하면 정의와 포악, 공의와 부르짖음이 발음이 똑같다. 유심히 듣지 않으면 똑같다.
미쉬파트 미쉬파흐 발음 상 차이가 없다. 하나님은 정의를 바랬는데 사람들은 미쉬파흐 포악을 가져왔다.
공의 쩨다카 하나님은 바랬는데, 그들이 가져 온 것은 짜하카 부르짖음.
부르짖음은 억눌린 가난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소리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과는 살짝 다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우리가 도적질이나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이기적인 삶을 산다.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다. 이중적인 삶을 산다.
하나님의 절망, 낙심을 표현하고 있다.
포도원의 비유는 이사야가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아온 비유이다.
왜냐하면 광야 같은 이 곳에서 잘 되는 것은 포도원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포도나무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심었구나라는 생각이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시편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아삽의 시에도 잘 나와 있다.
출애굽을 시켜서 가나안 땅에 데리고와 심은 것이 하나님이다. 그 포도나무가 이스라엘 나무라는 것이다.
시 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이미 시편 시대부터 포도원의 비유로 하나님 사랑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에 이 노래가 또 나온다. 왜?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는다.
하나님이 강조하셔도 듣지 않고 있다.
신기한 것은 교회에서 설교시간에 좋은 이야기 하는가? 나쁜 이야기 하는가?
서로 좋은 이야기로 인사하는가?
교회 만큼 좋은 설교, 기도, 인사, 찬양 한다.
그런데 왜 교회가 문제 투성일까?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우리는 극상품 포도나무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들포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남들이 봐도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유대인들이 이상해. 이러면 안된다.
이것이 나의 모습이다.
아무리 좋은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려도 내 자신은 부패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내 욕심을 채우고 남들을 찍어 누르는 악한 사람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안다고 바뀌는 것은 아니고 내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방법이 없는가? . 젖붙임이다.
(요 15:1, 개정)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요 15:2, 개정)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우리 구원을 위해서 이땅에 오신 분이 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이다.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는 포도나무가 오셨다.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젖붙임을 받으라는 것이다.
너희는 안된다. 아무리 배워도, 가져도 누려도 새로워지는 방법은 없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라. 하나님의 회복을 기다려라.
심판 속에 회복을 준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라.
오늘도 그 사랑 안에 우리가 있다.
하나님의 이 사랑속에 나의 악함을 고백하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축원드린다.
기도
1)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낙심만 하지만 말고, 그 속에 나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게 하소서.
2) 오늘도 예수님에게 젖붙임 받아,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하루를 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