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 :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찬송가 242장)
말씀 : 시편58편 1~1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와 이 사회는 정의가 죽었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하소연합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말처럼 많은 지도자들이 정의로운 통치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의를 그토록 많이 말하는데 왜 이 땅에는 정의가 없을까요?
정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말이 ‘올바른 도리’라는 단어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올바른 것입니까? 했을 때는 대답이 제각각입니다.
“올바른 것은 법이다.”라고 말하면 법이 올바른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법이 과연 올바릅니까? 법을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일부일처제의 법을 가지고 있지만 반대로 어떤 나라에서는 일부다처제의 법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먹여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법을 과연 객관적으로 올바르다 할 수 있습니까?
또한 결혼이라는 제도도 남자가 여자라는 이성 간의 관계만이 가능한 나라가 있다면 유럽이나 미국 몇몇 주에서는 동성 간의 결혼을 허용합니다. 일부다처제나 동성 결혼을 법으로 제정한 나라들은 그것을 허용할 뿐 아니라 이 제도를 공공장소에서 비판하면 처벌을 받게 됩니다. 과연 그런 법을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정의를 외치지만 정작 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그들 역시 정의롭지 못한 생각과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의를 인간의 생각으로 세운 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외친다면, 얼마든지 잘못된 길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시편 58편에서 정의롭지 못한 악인들의 판결과 악에 대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1절에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라고 말입니다.
다윗은 통치자들이 정의로운 판결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통치자들의 판결이 그릇된 이유는 그들이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실천할 의지도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정의로운 판결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한데 정의로운 판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에 과부와 재판장 비유에서 재판장이 과부의 원한을 들어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나 과부를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귀찮아서 들어주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진짜 모습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자들은 약한 자나 가난한 자들을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정의로운 일을 행할 수 없고, 만일 한다해도 귀찮아서 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정의와 올바른 판결을 하지 않는 통치자들에 대해 4절에 보면 다윗은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귀머거리 독사와 같다고 표현합니다. 이들에게 정의란 말은 결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직 악한 행실과 폭력을 일삼는다고 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통치자들만이 이런 일을 일삼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들도 역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악한 통치자들을 맹종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솔로몬이 하나님을 떠나 죄로 타락한 이유로,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시대 때에는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나뉘게 하십니다. 남쪽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는 르호보암 왕이 지배하지만 북쪽 나머지 열 지파는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통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북쪽 왕이 된 여로보암은 혹시라도 북쪽 백성들이 남쪽 르호보암 왕에게로 갈까 봐 꼼수를 부립니다.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각각 둡니다. 그런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를 가리켜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고 교육합니다.
그런데 이 북쪽 이스라엘 왕이 된 여로보암의 죄도 문제이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별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가리켜 하나님이라 했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그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보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요,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절대 우상이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소.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생활할 때,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시오. 그런데 지금 당신 역시 똑같은 죄를 하나님께 짓고 있소. 우리는 금송아지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길 수 없소.”라고 말했다면 아마도 여로보암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질책하기는커녕 경배하기에 바빴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맹종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자신의 배를 채우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움직였습니다.
이들에게 무슨 정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악한 재판장들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정의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그 위치에 올랐을 때는 똑같은 악한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법과 도덕과 윤리는 분명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 자체가 정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무엇입니까?
정의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58편은 5절까지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5절가지는 법에 호소하는 시인의 탄원입니다. 하지만 6절부터는 급격하게 기도의 용어로 바뀌고 있습니다.
6절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하나님이여 –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6절부터 11절까지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며 나의 판단으로 해결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또 세상 법정에 세우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잠깐만 몸춰 호흡을 가다듬고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세상 법에 호소하고, 나의 판단으로 처리하는 것이 맞는지! 나는 정의를 말할 수 있지만 정의롭지 못합니다.
세상 법정이 정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 때 사울을 죽였다면 일은 손쉽게 풀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결에 맡겼습니다. 자기 판단은 정의롭지 못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공의롭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십시오. 하나님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풀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런 귀한 은혜를 경험하는 오늘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1) 세상이 잘못된 것을 정의라고 말할 때, 그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의를 판단하는 지혜를 얻게 하소서.
2) 내 이익을 위해서 빨리 답을 얻으려는 행동을 멈추고 시간이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기다리는 믿음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