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삶을 위하여
본문 시편 26:1-12
찬양 찬송가 546 주의 약속하신
인간이 스스로 “나는 완전하다.” “나는 죄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교만입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1절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또한 6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11절에서는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본 시편을 대하면, ‘이렇게 교만한 기도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이죠.
사실 이런 오해는 “완전함, 무죄”라고 번역되어 있는 ‘톰’이라는 히브리 단어 때문입니다. ‘톰’이라는 단어는 원래 ‘온전함, 순전함, 전심으로 진실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완전하다, ‘내가 무죄하다.’라는 말은 아무런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흠이 없고 죄가 없기 때문에 의인이야.’라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이 말은 자신이 옳은 길을 택했다는 것입니다. 옳은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양심적으로 스스로를 정죄할 죄와 악이 없다는 말입니다.
때 묻지 않은 정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보이신 범위 안에서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이렇게 본인이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온전함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하였사오니…”
시인은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확고한 인생을 살고 있음을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른 길로 가지 않는 모습입니다. 3절에서도 비슷하게 말을 합니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진리를 따라 살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걸어 왔다는 것이죠.
이것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인생입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주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온전함이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을 기준으로. 주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배경, 나의 지식, 나의 경험…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5-17)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내 행동의 지침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온전하게 세우는 힘입니다. 능력입니다.
온전함은 어떤 운동이나 구호나 챌린지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이뤄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진리 위에 서 있습니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말씀의 기초를 가지고 있습니까? 다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주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로 시인은 온전함을 유지하기 위해서 ‘구별’을 택했습니다.
4-5절입니다.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무슨 뜻입니까? 시인은 모든 악한 무리를 멀리했다는 말입니다. 악한 길을 피했다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같이 앉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의 서론인 1편에 나오는 복 있는 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입니다.
악한 자들 주변에 기웃거리지 않고, 그 길에 서지도 않으며 함께 앉지도 않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유행을 하면서 전 세계인들이 쓰는 말이 생겼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 설명을 안 해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바이러스라고 하는 것이 가까이 있으면 전염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적어도 1m 이상 거리를 유지하자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만약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지 않았으면 몇 배나 더 높은 감염률을 보였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감염의 시작은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죄의 오염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의 오염은 함께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악인과 구별되지 못한 삶. 악인과 거리두기를 하지 못한 삶에서부터 죄의 오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에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완전한 구별을 요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적당한 구별을 했을 때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그것이 이스라엘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죄와 거리두기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겠다고 타인과 거리두기를 열심히 하고, 손세척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주의 자녀가 죄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죄와 거리두기. 악한 자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죄와 거리두기를 실천하고 있으십니까? 바이러스를 피하기 위하여 육체의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것처럼 죄의 오염을 피하기 위해 영혼의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제목
-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을 두고 살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 죄와 거리두기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